일백 개의 산을 넘어 글누림 비서구문학전집 5
레이나 그란데 지음, 박은영 옮김 / 글누림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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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중 한 챕터로 이 작가의 사연이 소개되어 급관심이 생겼다. 국내에 이 작품이라도 나와 있어 부분적 실체나마 접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멕시코 출생과 미국 불법이민의 개인사를 겪은 가진 작가가 자신의 체험과 느낌을 고스란히 이 데뷔작에 쏟아놓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가난한 멕시코인들에게 이웃 나라 미국은 저 건너편(El Otro Lado)’이다. 국경만 넘어가면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출할 수 있기에 그들은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월경을 시도한다. 후아나의 아버지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훗날을 기약하면서. 익숙한 장면이다. 우리도 어려운 시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으며, 동남아인들 역시 이곳에서 마찬가지의 기대를 품는다.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며 남겨진 후아나와 엄마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경제적 곤란과 버림을 받았다는 심적 두려움과 배신감. 전자를 견디지 못한 엄마는 돈 엘리아스에게 몸을 허락한다. 심적 불안과 도덕적 비난은 그녀가 임신을 하면서 극도로 격해지며, 돈 엘리아스에게 아기를 빼앗기면서 절정에 달한다.

 

밖에서 엄마는 바위에 대고 접시를 던지기 시작했다. 접시는 하나씩 날아가 산산이 부서졌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엄마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컵을 던졌다. (P.107)

 

후아나는 자신의 행위가 원인이 되었다는 죄책감마저 더해진다. 두 사람의 삶은 서서히 수렁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독실한 신앙심도 희미해지고, 엄마는 알코올중독에 빠졌으며 어린 후아나는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방엔 그들의 처지를 비웃고 비난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후아나는 성인들과 과달루페 성모가 자신들을 위해 곁에 있어주었던 오래전을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성상들은 먼지에 덮였고, 꽃잎들은 시든지 오래다. (P.173)

 

이후 후아나의 일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다. 아버지를 찾으려는 후아나의 갈망은 정보와 경비 마련을 위해 창녀 생활마저 감수하도록 만든다. 그 선택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은 논란이 있겠지만, 아버지 찾기를 절대가치화하는 후아나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만 돌아오면 모든 비정상이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정말로 버렸는지, 그랬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 이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숨 쉬고 온전한 밤잠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랑조차도.

 

아델리나, 사랑을 위해서조차도 아버지 찾기를 그만둘 수 없는 거냐?”

사랑을 위해서도요.”

사랑은 찾기 힘들어.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 네 젊음을 유령을 찾느라 허비하지 말아라.”

저희 아버진 유령이 아니어요. 저는 그를 찾을 거예요.” (P.209)

 

미국에서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돈 에르네스토의 권유에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다.

 

이 작품은 계급 대립적 구도를 지닌다. 부유한 미국과 가난한 멕시코, 부조리하지만 잘 사는 돈 엘리아스와 정직하지만 못 사는 후아나의 아버지. 그리고 후아나의 엄마를 위협하고 정복하는 돈 엘리아스와 아델리나에 기생하며 착취하는 헤라르도. 헤라르도는 여러 면에서 돈 엘리아스의 판박이다. 차이점이라면 누구는 죽임을 당했고 다른 이는 살인을 했다는 것인데, 대응되는 여인들의 의지와 주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다.

 

중간에 삽입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 토막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일조한다. 버스에서 쫓겨날까 봐 아이의 죽음도 내색하지 못하는 아이엄마. 아이들을 만나려고 월경 일행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는 불법체류로 추방된 여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아이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무너지는 여인.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자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남성 중심의 엄격한 가부장 체제에서 여성은 종속적, 수동적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므로. 이에 반발하고 나선 게 페미니즘이다. 이 작품은 엄밀히 여성주의 유형에 속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후아나의 삶은 제아무리 정당화하더라도 아버지의 존재에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이 이렇듯 만사를 비정상화시킬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온당한 것인가. 그녀에게 아버지는 실제를 초월하여 극도로 이상적인 존재로 미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야 자신의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경감될 수 있고, 자신의 아버지 찾기 노력이 유의미성을 갖게 되니 말이다.

 

후아나의 미국행은 순탄치 않았다. 비용 마련을 위해 티후아나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일행과 함께 월경을 감행하며 성공을 목전에 두고 실패하는 대목은 영화의 한 장면과도 극적인 스릴이 넘친다. 후아나는 진정으로 아델리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후아나는 여느 멕시코 여인들처럼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19년 만에 그녀는 아버지를 찾는데 성공한다. 비록 유골이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 이제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떳떳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아델리나가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평화.

그리고 진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P.249)

 

후아나(아델리나)가 자신의 친동생과 상면하게 되는 장면은 감동적인 동시에 감상적이다. 후아나(아델리나)의 입장에서는 비밀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작중 인물의 말마따나 때로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차라리 후아나(아델리나)와 세바스티안과의 관계처럼 알 듯 모를 듯 여운을 남기는 게 결과적으로 좋았지 않았을까. 친동생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어떤 남자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충분히 많이 있었다. 그녀가 마음속에 머물도록 허용한 유일한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비록 그가 오직 기억에 불과할 지라도 말이다. (P.122)

 

아델리나가 세바스티안을 만날 때 품은 심정이다. 이때는 단지 아버지의 존재감을 강조한 문장으로 이해되었는데, 후에 아델리나가 되기 전 후아나의 삶을 볼 때 새삼 새롭게 의미가 다가왔다. 그녀는 세바스티안과 정말로 정상적인 삶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구성이 특이하다. 아델리나와 후아나가 각자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종래에는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양자는 이름만큼이나 시기와 지역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그들의 삶 자체도.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작중 진짜 아델리나를 통해 서로가 연계되어 있음을. 이것은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당대에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이며 작가가 상당 부분 체험하였기에 생생함은 논픽션 못지않다. 부분적 아쉬움은 있지만 미국-멕시코의 현대 모습을 담고 있어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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