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범우문고 1
피천득 지음 / 범우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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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여자대학교가 가톨릭대학교로 통합되기 전 성심여자대학교라는 이름을 들을 때면 피천득의 수필 한 편이 상기된다. 비록 춘천이 아닌 부천이지만. 영화 셀부르의 우산,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도 언제나 아사코와 연상된다. 이 모든 게 피천득의 수필 인연덕택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정받는 수필가는 단연 피천득이다.

 

그의 수필선을 간만에 다시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그는 글을 참 정갈하게 잘 쓴다. 단아하지만 유약하지 않으며, 거칠지 않고 세부까지 세심하게 갈무리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로 이끌어내면서 독자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상념과 정서가 보편적이어서다. 영문학자답게 서양적 배경을 보이면서도 함몰됨 없이 고유의 전통미도 지키고 있다. 그의 수필관은 너무나도 유명한 짤막한 한 편의 수필에 녹아들어 있어 구구한 설명이 불필요하다.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P.51, ‘수필’)

 

엄마와 딸의 존재는 아마도 그의 문학적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는 절대적 동기인 듯싶다. 어릴 때 아빠가 세상을 뜬 후 그는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하였다. 엄마마저 수년 후 사별하게 되니 엄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훗날 딸에 대한 절대적 애정으로 표출되었던 것. 그의 글 중 양자를 소재로 한 이야기가 비중이 큰 연유가 아니겠는가. ‘그 날’, ‘엄마는 엄마를, ‘서영이와 난영이’,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는 딸을, 그리고 인연’, ‘유순이’, ‘구원의 여상을 일반 여성을 각기 소재로 삼고 있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엄마가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영영 가버릴 것을 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 (P.69, ‘엄마’)

 

딸에 대한 애정은 너무도 절절하여 때로는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다.

 

너는 시집살이 잠깐 하다 따로 나와 네 살림을 하게 된다니 너의 아버지 집 가까운 데서 살도록 하여라. (P.109,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

 

작가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구원의 여인상을 구원의 여상에서 조목조목 나열한다. 세상에 그런 여성이 존재나 할까? 그러기에 유순이에 대한 그리움은 구원의 여인상의 현현(顯現)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난리 통에 유순이를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행위는 동정과 연민 그 이상이나 유순이의 맑은 눈에 발길을 돌리고 만다.

 

나는 술과 인생을 한껏 마셔보지도 못하고 그 빛이나 바라다보고 기껏 남이 취한 것을 구경하면서 살아왔다. (P.97, ‘’)

 

작가는 자신이 뜨거운 삶을 살지 못하였음을 자탄한다. 반면에 독자는 덕분에 그의 섬세하고 따스하며 소박하기조차 한 명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나 할까. 가끔 세속의 차갑고 얄팍하며 혼탁함에 착잡해질 때면 그의 글 한 편을 읽고 정화하고 싶다.

 

얄팍한 문고판임에도 서두에 작가론을 수록하였고, 말미에는 작품론의 세 편이나 싣고 있는데 이 모두가 수필문학가로서 작가의 위상을 시사한다.

 

* 내가 읽은 책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것의 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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