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마타사부로 / 은하철도의 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야자와 겐지 지음, 심종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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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으로서 성가가 높은 <은하철도의 밤>이다. 일전에 <주문이 많은 요리점>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동일한 작가임을 이제 알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감명 깊게 시청하여 원작에서 많은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을 안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작에서 모티브를 따갔을 뿐 양자는 독자적인 예술장르다.

 

금세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주인공 이름이 이탈리아인이라는 점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다. 해설에서처럼 <태양의 나라>를 쓴 캄파넬라와의 연관성을 따져볼 수도 있겠고, 어쨌든 작가는 이 작품의 배경이 일본이라는 점을 굳이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우주와 천문에 대한 관심도 두드러진다. 은하수에 관한 과학수업으로 시작하며, 조반니는 은하철도에 승차하여 은하계를 종단한다. 각 정거장은 은하수의 주요 별자리를 상징한다. 이 점이 훗날 공상과학 장르와 결부시키기에 유리한 점이다.

 

조반니는 고독하다. 아빠는 부재 상태, 엄마는 아프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방과 후에 일을 해야 하는 지경이다. 친구들과 놀지 못하고 거리감이 생긴다. 우울하고 슬프다.

 

조반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해져서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P.89)

 

조반니의 눈에는 또 눈물이 가득 고여 은하도 마치 먼 곳으로 가버린 듯이 아득히 뿌옇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P.133)

 

이런 고요하고 좋은 곳에서 난 왜 더 유쾌해질 수는 없을까? 왜 이렇게 홀로 쓸쓸할까? (P.135)

 

은하철도는 저승행 열차다. 빙산에 부딪쳐 조난당한 배의 탑승자를 비롯한 여러 승객들은 남십자성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기도한다. ‘끝까지 같이 가자는 조반니의 애원에도 캄파넬라는 홀연 듯 사라진다. 오직 조반니만이 내리지 않아도 되는 존재다.

 

조반니의 은하철도는 한바탕 남가일몽이다. 무익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일생을 걸친 체험을 단시간 내에 압축하여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정교한 장치다. 꿈속 여행을 통해 조반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매진하기 위한 용기를 찾는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저 꼭 잘 살아갈게요. 반드시 진정한 행복을 찾겠습니다.” 조반니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P.154)

 

기독교적 요소와 천문학적 지식이 결부되고, 글자그대로 환상이 결부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기이하며 신비롭다. 무엇보다 독특함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애니메이션은 원작에서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전혀 다른 주제의식과 접근방식을 지닌다. 환상을 모티브로 또다른 환상을 촉발했으니 단순한 모방과 재현이 아닌 발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바람의 마타사부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면서도 일본의 민속적 요소와 자연 배경을 한껏 드러낸다. 불과 열흘 남짓 함께 보낸 후 홀연히 다시 전학 가버린 사부로. 그는 아이들이 지칭하는 대로 바람의 마타사부로일지도 모른다.

 

그때 바람이 휭 하고 불어와서 교실의 유리창은 모두 덜컹덜컹 울리고, 학교 뒤쪽 산에 있는 억새나 밤나무는 모두 이상하게 창백하게 되어 흔들리고, 교실 안의 아이는 무언가 때문에 웃고는 조금 움직인 듯했습니다. 그러자 가스케가 즉시 소리쳤습니다.

 

아 웃었다, 저 녀석은 바람의 마타사부로야.” (P.6~7)

 

이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인물 자체보다도 오히려 자연풍광이라고 하겠다. 산골마을에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첫머리부터 작중을 압도하는 바람의 존재는 작품 말미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다.

 

바람은 아직 그치지 않고, 창유리는 빗방울 때문에 흐려지면서 아직도 덜컹덜컹 울렸습니다. (P.71)

 

아이들은 사부로와 금방 친구가 되어 포도를 따러 가고, 강에서 헤엄치며 논다. 아이들은 사부로를 바람신과 연관 짓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미지의 힘이 무의식중에 아이들에게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가스케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마타사부로가 유리 망토를 입고 하늘로 번쩍 날아올라가는 환상을 경험한다. 바람이 유달리 세차게 부는 날 이치로는 마타사부로가 날아갔을지 모른다며 서둘러 학교로 달려간다. 예감대로 마타사부로는 떠나갔다. 가스케와 이치로는 날아서 갔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마타사부로의 정체는 어른의 시각에서 명백하다. 아이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다. 작가는 여기서 일본 동북지방을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 아이와 아이, 어른과 아이 간에 빚어지는 차이와 대립의 잠재요소를 너그럽게 포용한다. 사부로는 마타사부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 다라고 해도 좋다. 그는 차량으로 떠났을 수도 날아서 갔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모든 것을 풀어놓지 않는다. 뭔가 긴하고 중한 것을 잠시 엿보이게 한 후 슬쩍 덮어버린다.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 기억에 오래 남았던 연유도 마찬가지며, <은하철도의 밤>도 동일하다. 작가는 빈 여백을 독자가 주도적으로 채우길 바랐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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