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목양신 - 또는 몬테 베니 이야기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3
너다니엘 호손 지음, 김용수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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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몬테 베니 이야기>인데, 몬테 베니는 작중 주요 인물 네 명-미리엄, 힐다, 케년, 그리고 도나텔로-가운데 도나텔로를 지칭한다. 도나텔로의 집안이 토스카나 지방의 유서 깊은 몬테 베니 백작 가문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에 따르면 로맨스. 호손은 자신의 주요 소설들을 로맨스로 굳이 구분한다. 신생 미국에서 로맨스를 쓰는 어려움을 토로한 호손이기에 유럽, 그것도 로마라면 풍부한 로맨스의 소재가 넘쳐났을 것이다. 로맨스는 중세에 연원한 형식이므로.

 

호손의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방대-<주홍글자>에 비하면 거의 두 배 분량이다-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는 전형적인 호손의 특성과 함께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의문감이 끊이지 않고 내심에서 분출하게 된다. 방대함의 적절성에 대한 의구심이다.

 

주요 인물들 간의 대화와 사건의 얽히고설킨 전개는 그렇다 하자. 또 도나텔로를 제외한 그들의 직업이 예술가, 즉 두 명은 화가, 한 명은 조각가이므로 회화, 조각, 건축 등에 대한 비평과 작품 소개 및 감상이 일정 부분 등장하는 것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로마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과도할 정도로 상세한 소개와 묘사는 불필요하게 작품의 방대화에 기여한다는 인상이다. 이 부분을 대폭 축소하였다면 최소한 <일곱 박공의 집> 정도에 가깝게 독자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소설이 아닌 기행문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약 이백년 전 미국인들 가운데 유럽 여행을 해본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네들의 문화적, 정신적 뿌리가 유럽이므로 많은 호기심이 있었음에도 시간적, 경제적 형편상 극소수만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로마의 유서 깊은 문명의 자취에 대한 당대인의 지적 호기심과 갈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나중에 작품해설에서 옮긴이는 많은 당대인들이 이 작품을 로마 여행서로 받아들였다고 언급하여 이 추측을 입증한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은 미리엄과 그녀를 둘러싼 전혀 대조적인 두 인물 간의 과거와 갈등, 그리고 대립이다. 도나텔로와 대리석 목양신 조각상의 놀랄만한 유사성은 작품 첫머리에서 인물들 간에 화제거리가 되지만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인 농담을 통해 복선을 구축한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게다가 빼어난 미모의 미리엄의 주위를 배회하는 정체모를 인물 모델의 음험하고 사악하기 조차한 이미지. 이 둘은 빛과 그늘, 지상과 지하, 낮과 밤, 순진과 죄 등 완전히 상반되는 유형의 인물이다.

 

여기에 미리엄의 모호함과 비밀이 곁들여져서 작품을 다소 어둡고 모호하며 신비스럽게 이끌어간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어둠과 죄악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속박을 암시하는 미리엄의 대사는 절실함과 동시에 숙명적 체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날, 떠나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운명이 지워진, 다른 세상에서 온 여자인 나와 함께 이 숲에서 헤매는 것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니야. (P.103)

 

당신은 날 떠나야 해!......당신의 시간은 지났고, 그의 시간이 왔어! (P.112)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다. 순수하고 무구한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미리엄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사실적이다. 반면 도나텔로와 힐다는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순진과 순수를 상징한다. 느리고 단조롭게 흘러가던 시간은 운명적인 사건 이후 급변한다. 그들 넷은 뿔뿔이 흩어지고 단편적으로 재회하지만 결코 과거를 회복할 수 없다.

 

신화 속 목양신처럼 자연과 환력, 순진의 화신이었던 도나텔로는 미리엄을 사랑하게 되면서 서서히 변모하며, 운명적 사건 이후 전혀 다름 사람이 되었다. 풍부하고 즐거우며 건강한 삶, 단순하고 흠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던 도나텔로는 에덴동산을 떠나게 된 아담이 되었다. 그 사건이 미리엄에게 미친 파장보다 도나텔로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은 이런 연유다.

 

조각가는......얼마나 철저하게 그 멋지고 신선한 야수적 기운의 광채가 그의 얼굴에서 떠나버렸는지를 목격하고는 깜짝 놀라고 경각심이 일었다......모든 그의 젊은이다운 쾌활함과, 그와 함께 단순한 매너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어도 그림자로 가려졌다. (P.216)

 

이따금, 불쌍한 도나텔로는 마치 비명을 들은 듯 깜짝 놀랐고, 가끔은, 마치 보기에도 두려운 어떤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어진 듯, 뒤로 움츠렸다. 이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죄와 슬픔에 대한 신기함으로 당황하여, 유사함 때문에 그리고 장난삼아서 그의 세 친구들이 환상적으로 그를 바로 그 <프락시텔레스의 목양신>으로 인식했던 그 기이한 유사함이 그에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P.238)

 

죄를 저지른 미리엄과 도나텔로와 달리 힐다는 순수 그 자체이다. 옛 대가들의 영혼과 일체화된 공감을 지니고, 성모의 성소를 지키며 비둘기들이 힐다를 따르는 설정에서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목도하게 된 죄의 현장, 그리고 범죄와 윤리, 우정 사이에서 그녀는 미리엄을 이해하고 용서하길 거부한다. 그녀는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고자 애쓰나 고뇌는 날로 깊어진다.

 

힐다의 상황은 모든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의식 안에 가둘 필요성으로 인해 무한히 더 비참해졌다. 미리엄의 범죄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연하고 섬세한 영혼 안에 간직한 이 순수한 소녀에게는, 그 효과는 마치 자신이 그 범죄에 참여했던 것과 거의 같았다. (P.376)

 

죄로 얼룩진 비참한 자들보다 어느 누가 순수한 자의 부드러운 구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옷이 얼룩이지지 않도록 이기적으로 조심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그 죄지은 자들을 우리의 심장에 가까이 껴안지 못해야 한다면, 우리가 순수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어디에 그들의 가장 안전한 더 이상의 악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있는가! (P.439)

 

조각가 케년은 이해자이자 중계자이다. 그는 도나텔로의 변화를 통해 죄의 윤곽을 알아차리면서도 도나텔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미리엄에 대한 힐다의 완고함을 책망하면서 세상이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님을 지적하는 그는 건전한 이성과 감성의 소유자라고 하겠다. 그는 도나텔로와 미리엄의 재회와 화해를 유도하면서 그들에게 참회와 속죄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정신적, 예술적 감성은 아폴론적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지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힐다, 당신은......악한 것들에 어떠한 선의 혼합물이 있을지, 그리고 아무리 엄청난 범죄인이라도 그의 행위를 그 자신의 견지에서, 아니면 어떤 측면 지점에서라도 바라보면 결국은 그렇게 논의의 여지없이 유죄로 보이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것을 모르오. (P.437)

 

세속적 희열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질고 고통스러운 삶을 향한 상호간의 높임과 격려를 위해서, 당신들은 서로의 손을 잡으시오. 그리고 만일, 옳은 일들을 향한 수고, 희생, 기도, 회개, 그리고 진지한 노력에서 결국은 음울하고 사려 깊은 행복이 나오거든, 그걸 맛보고 하늘에 감사하시오! (P.369)

 

호손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어는 죄와 죄의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천방지축이던 도나텔로는 죄를 통해 변모하였다. 어떤 점에서 보다 성숙해졌다고 하는 게 마땅하다. 죄를 통해 도나텔로는 양심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내면에의 성찰과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인식,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재고하게 되었다. 섣부르게 단언하면 죄와 죄의식은 인간의 성숙에 있어 필요악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볼 때 에덴동산에서의 원죄는 결국 인간이 자연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셈이다.

 

그것은 그를 불붙여 어른으로 만들었었고, 그의 내부에 우리가 여태껏 알아왔던 도나텔로의 어떠한 원래의 성격도 아닌 어떤 지성을 생성시켰었다. 그러나 저 단순하고 기쁨이 넘치는 인물은 영원히 떠나갔다. (P.206)

 

그 어조는 또한 변화되고 깊어진 성품을 말해 주었다. 그것은 슬픔과 양심의 가책을 통해 왔었던 생생해진 지성과 정신적인 가르침에 대해 말해줬다. 그래서 제멋대로인 소년, 장난기 어리고 동물적인 성격의 존재, 숲의 목양신대신에, 여기 이제 감성과 지성을 지닌 남자가 있었다. (P.366)

 

케년의 추론은 오래된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와 같이 예술과 종교로의 확장을 넘어 인간과 종교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아담과 에덴동산까지 이르는 근본적 문제제기에서 케년과 작가는 한 발짝 물러난다. 케년은 힐다의 사랑을 얻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불가피하였다. 반면 작가는 이 작품이 가져올 종교적 논란의 불씨를 확대하고 싶지 않았서였을 것이다. 작가는 예술가이지 사회변혁가는 아니며, 호손 자신도 노예해방 사안에서는 미온적 내지 온건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로마 유적과 유물과 연관하여 읽어나가면 무척 흥미로울 듯하다. 대리석 조각상과 케년의 클레오파트라 조각상, 힐다가 모작한 르네상스기의 거장들 회화, 보르게세 장원의 즐거움과 카타콤브의 음울함, 트레비 분수와 콜로세움 등등. 하나 작가가 이를 사건과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소재와 배경으로 삼았음은 명백하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실패한 낭만주의 작품이라고 지적한다. 느슨하고 흐트러진 구성, 모호하고 난해한 신화적 상징성으로의 편향 등을 제기하면서. 근대적 소설이 아닌 로맨스의 관점에서 볼 때 모호함과 신화적 상징성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조성하였으니 전혀 단점이 될 수 없다. 구성 역시 <보카치오><캔터베리 이야기>, 아니면 <돈키호테>만 떠올려 봐도 전혀 느슨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대성을 지니고 있어 작품 성격에 부합하는 의도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에서 상징적 알레고리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과 대립을 병행하는 로마라는 역사적 도시의 풍요로운 유산에 힘입고 있다.

 

케년과 힐다는 현실에 복귀하고 안주하는 길을 따른다. 도나텔로와 미리엄은 현실에서 추방됨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한 단계 초월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길은 작중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인습과 전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보다 진실 된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 길임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들이 존재의 표면과 환각적 즐거움들 밑의 어느 것이든 알려면 그 동굴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올 때, 비록 첫 번째 대낮의 눈부신 빛에 눈이 부시고 앞이 캄캄해지지만, 그들은 그 이후 영원히 더 진실 되고 더 슬픈 삶에 대한 견해를 취한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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