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대산세계문학총서 50
나다니엘 호손 지음, 김지원.한혜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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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자><일곱 박공의 집>을 읽은 후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들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불과 몇 쪽을 채 읽지 않아서이다. 호손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전작들을 염두에 두고 기대했다면 난감하면서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 작품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이 소설은 기존에 호손이 즐겨 사용했던 전지적 삼인칭 시점을 과감히 포기하였다. 따라서 독자는 호손 특유의 농담과 빈정거림 등 이전 작품들에서 해학미를 안겨주었던 요소를 여기서 찾기 어렵다. 내용 전개는 커버데일이라는 작중 화자의 일인칭 시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호손은 작품 형식면에서 여전히 로맨스를 채택한다. 서문에서 작가는 로맨스를 옹호하며 이렇게 말한다.

 

환상세계, 즉 현실 세계와 너무 흡사하여 적당한 거리에서는 그 차이가 무언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묘한 마법의 분위기가 감도는 세계는 아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분위기가 미국의 로맨스 작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P.8)

 

현실이되, 현실 같지 않은 현실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보다 젊은 시절 잠시 참여하였던 사회주의 공동체 농장을 되살린다. 농장 시절은 그에게 썩 유쾌한 추억은 아니었던 듯하다. 공상,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실행은 이내 현실의 차디찬 벽을 넘어서지 못하였으니. 어쨌든 자신이 구상한 의도에 부합하여 가공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무대로서 작가는 농장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필경 내 일생에서 가장 낭만적인 일이었고,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지만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허구와 현실 사이를 이어주는 발판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P.8)

 

호손 특유의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는 여기에서도 변함없다. 독자는 블라이드데일 농장을 다루는 작가에게서 두 가지 태도를 보게 된다. 먼저 농장을 묘사하면서 자연스레 독자에게 심어주는 불길한 전조, 그리고 커버데일의 생각과 판단으로 드러내는 농장의 미래에 대한 암시적 예감. 커버데일이 농장에 도착한 날의 악천후는 어둡고 거친 나날의 전망을 상징한다. 이상의 실현에 대한 부푼 기대와 희망을 품은 인물의 의지적 결단을 비추는 현상으로서는 이례적인 기술이다.

 

밤이 깊어가고 외부의 고독이 창문을 통해 우리를 엿보고 있었다. 그 고독은 그 순간 우리끼리만 재잘거리고 부산을 떨고 있는 따뜻하고 밝은 공간에 바짝 달라붙은, 또 다른 존재인 양 음산하고 거칠고 희미했다. (P.51)

 

사일러스 포스터의 충고는 블라이드데일의 삶이 목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며, 게다가 커버데일은 곧바로 건강이 악화되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이는 곧바로 커버데일의 의구심과 회의감으로 표현된다.

 

정말이지 좀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탐욕스럽고 서로 싸우고 이기적인 세상으로부터 이제 막 결별하자마자 제기된 첫 번째 문제가 바로 어떻게 하면 외부의 속물들보다 우위를 점하느냐 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니. (P.30)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사회는 좀처럼 함께 단결하기 어렵고, 또 오래 버티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른바 구부러진 지팡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유별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한 다발로 묶는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P.82)

 

작가는 항상 인간 성격의 탐구에 관심이 많다. <주홍 글자>가 죄와 죄의식, 그리고 양심이 주된 관심 영역인 반면, <일곱 박공의 집>에서는 위선과 인간상의 대비-탐욕적 인간상과 순수하고 이상적 인간상-라는 관점에서 탐구하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커버데일의 시각에서 주요 인물 세 명-홀링스워스, 제노비아, 프리실라-을 이해하고 추측하고 판단한다. 농장의 무수한 다른 사람들과 그 밖의 인물들은 중요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작중 화자인 커버데일은 그러나 주인공이라고 부르기에는 마땅치 않다. 그는 관찰자다. 그는 사건의 핵심에서 살짝 비켜나있는 인물이면서 완전히 궤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 일에서 내 자신의 역할은 특이하게도 보조적인 입장이었다. 그것은 고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과 비슷했는데, 자신의 중요한 미래에 대해서는 초연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대단한 희망이나 염려, 환희나 비애를 제공하는 그런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공감이 코러스와 다른 인물들 사이를 결속시켜준다. (P.123)

 

그는 다소의 건전한 상식과 충분한 이성과 (시인으로서) 빈약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분석과 어조는 매우 합리적이며 현명한 판단력을 보여주며 정의감도 제법 충만하게 보인다. 반면 자기현시도 꽤 있는 편이다.

 

나와 같은 통찰력을 지닌 사람......그녀는 나의 뛰어난 이성과 감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이는 내가 너그러운 동정심과 예리한 직관력을 가지고 (P.200)

 

커버데일의 눈에 비치는 홀링스워스는 박애주의라는 이상에 매몰되어 버린 나머지 독선적이고 도의심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무엇보다도 커버데일이 은연중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는 제노비아와 프리실라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친 용서할 수 없는 연적이기도 하다. 홀링스워스가 작중에서 점차 부정적으로 변모되게 술회되며 화자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는 것은 양가의 감정이 복합 작용한 탓이리라.

 

하나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러하다......그들에게는 사랑도 동정심도 합리적인 사고도 양심도 없다. 또한 그들은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한 어떠한 친구 관계도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P.91)

 

세상의 박애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죄는 도덕적으로 독선적이기 쉽다는 거죠. 그 사람들의 도의심은 다른 고결한 사람들의 도의심하고는 달라요. 그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디서일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의를 경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 같은 건 버려도 괜찮다고 믿게 되죠. (P.168)

 

소위 박애주의라는 것은 직업에 반영될 때는 사회를 향한 정력적인 충동으로 인해 흔히 유용하다고 인정되지만, 한 개인을 지배하는 열정이 늘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 흐르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해치거나 심하게 망가뜨리려는 경향이 있다. (P.300-301)

 

프리실라와 제노비아는 여러모로 두드러지게 대조적이다. 그들이 이복자매라는 사실도 이러한 기질적, 운명적 대조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솔직히 프리실라의 캐릭터는 그다지 흥미롭지는 못하다. 순진무구하다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단순하고 착하기 그지없으며 때로는 모자라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드는 인간상이랄까. 그것이 오히려 보호본능을 일깨워 주지만 결코 주체적인 삶의 영위자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는 만족해하니 충분하다.

 

프리실라의 불완전함과 결함은 즐거운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나를 사로잡았다......달리기 경주를 하는 프리실라의 독특한 매력은 달릴 때의 연약함과 불규칙한 움직임에 있었다. (P.95)

 

프리실라의 막연하고 겉으로 까닭 없어 보이는 충만한 행복감의 비결은 순결한 가슴을 축복하는 애정 때문인 것 같았다. (P.100)

 

나는 모두가 듣는 데서 물어보았다. 프리실라, 어디 가는지 알고 있나?

프리실라가 대답했다. 전 잘 몰라요. (P.216)

 

그리고, 제노비아! 농장에 생기와 화려함을 드리워 주고 커버데일의 가슴을 뛰게 만든 여인. 그녀는 아름답고 멋진 여성을 뛰어넘어 여권에 대한 당당한 주장을 펼칠 지성도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 제노비아가 홀링스워스의 박애주의 이상에 함몰된 것은 단순한 사랑을 넘어선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자신과 자신의 삶에서 부족하고 결여된 빛나는 가치, 그것을 홀링스워스는 지니고 있었고 불가능에 가까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헌신할 마음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노비아는 커버데일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드높은 이상마저도 기꺼이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놀람과 동시에 화가 났는데, 그때의 제노비아가 단지 비굴해 보였기 때문이다. 제노비아의 눈에 다소 눈물이 어른거렸고, 그것은 분노보다는 깊은 회한의 눈물이었다. (P.156)

 

여자가 아주 조금만 인습에서 빗나가도 그만 타락한 여자로 전락해 그 후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지요. (P.277)

 

후반부에 가서 우리는 제노비아의 과거 또는 정체를 추정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죄의 수렁에서 벗어나오기 위해 블라이드데일에 귀의했지만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사랑을 잃었고, 끝내 자신마저 잃게 되었다. 블라이드데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입을 통해 우리는 그녀의 한때마나 기쁨과 희망, 그리고 실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정말 바보 같은 꿈이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유쾌한 여름날을 안겨주었고, 그 동안만이라도 밝은 희망을 주었죠. 그 꿈은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안 돼요. (P.280)

 

왜 우리는 삶의 다른 모든 방식을 버리고 몇 개월 전의 소박한 생활에만 만족해야 하는 거지요? 물론 그때가 좋았어요. 하지만 다른 삶의 방식 역시 좋고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P.206)

 

인간에게 이상과 꿈은 현실을 지탱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삶을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원동력이다. 우리가 이상을 찬양하고 지향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추레한 삶을 도덕적으로 고양시켜 정화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도덕과 종교적 윤리가 자칫 독선과 해악으로 변질되기 쉽다는 사실을 호손은 전작들에서 충분히 제시하였다. 이상도 마찬가지다. 이상은 무소불위와 전지전능이 아니다. 이상의 환상만으로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의 새로운 생활에 도사린 위험은 우리가 진정한 농사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농사꾼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었다. 우리의 계획이 단지 이론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때 우리는 노동의 정신적 의미화라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P.85-86)

 

이상이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점에서부터 이상의 빛과 호소력은 깨어진다. 더 이상 눈부시고 화려하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던 구석과 그림자가 새삼스레 눈에 띄기 시작한다.

 

사실 이곳 생활은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지루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블라이드데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레 퇴색해버렸다. (P.174)

 

주택의 앞면은 언제나 인위적이다. 그곳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때문에 외관을 포장하고 꾸미고 숨기는 곳이다. 진실은 뒤쪽에 있으며, 허세와 기만의 전위는 앞에 있다. (P.188)

 

그래서 커버데일은 일찍이 홀링스워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누군가가 죽음으로 이 장소를 신성한 곳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이곳을 시적이고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인생의 체제로 느끼지 못할 겁니다! (P.164)

 

제노비아의 생과 사는 블라이드데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생시의 제노비아는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하였지만, 죽은 제노비아는 추하고 끔찍스럽다. 제노비아의 자살 시도에 대한 커버데일의 논평도 자못 냉소적이다. 블라이드데일의 이상도 애초에는 얼마나 찬미할 만하였던가?

 

죽은 모든 형상들 가운데 제노비아의 시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젖은 옷이 끔찍스럽게 굳어 있는 제노비아의 사지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죽음의 고통을 그대로 표현한 대리석 상이었다. (P.290)

 

홀링스워스에 대한 제노비아의 비난은 거짓 사랑을 깨달은 여인의 원성이자 맹목적 이상에 헌신하는 도덕적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다.

 

당신의 간악한 죄는 당신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양심을 억누르고 자신의 마음에 지은 엄청난 죄에요! 당신은 이 아이를 언제든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잖아요. (P.270)

 

그럼에도 블라이드데일을 추억하고 회상하는 커버데일의 상념은 온정적임을 숨길 수 없다. 그것은 가슴 아픈 상처이지만 한때의 열정과 시간과 노력을 경주하였던 소중한 시절의 기억이므로. 결과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고매한 이상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우리의 멋진 제노비아 만큼이나 각각 우수한 재능을 지녔던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고귀한 소망을 기울였던 체제에 대해 이렇게 자기만족과 우월감에 차서 그럴 자격이라도 있다는 듯이 찬성과 비난을 드러내 보이자 나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P.207)

 

그러니 그밖에 무엇을 후회하게 되든지, 내가 한때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해 갖가지 소망을 갖고, 그래! 그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실천에 옮길 충분한 믿음과 힘이 있었다는 것을 죄악시하거나 어리석은 짓으로 치부하지 말자.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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