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랭 사인 솔세계시인선 4
로버트 번즈 지음, 김명렬 옮김 / 솔출판사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다시 번즈의 시집을 꺼내든다. 명분은 충분하다. 여기에는 30편의 단시와 4편의 장시가 들어 있어 태학사 판에 비해 이 책에 수록된 시편의 수가 더 많다는 점, 그래서 그의 다른 시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게다가 그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발라드 <탬 오섄터>를 수록하였다는 점 등이다.

 

번즈의 시는 되풀이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고 일말의 지루함도 느낄 수 없다. 시 속의 화자는 시대를 달리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울리고 있다. 그들의 육성은 꾸밈없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이 현대인들에도 여전히 공감을 주는 것이다. 번즈 시의 특성, 즉 사랑, 노래, 향토색, 민중지향성, 해학미, 여성 화자 등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감상이 여전히 유효하다.

 

일단 새로 접하는 작품들 위주로 간단하게 언급하면, 여성 화자의 작품들이 눈에 띤다. <내 침실문 앞에 있는 이 누구예요?>에서는 여성과 구애하는 남성 간의 밀고 당기기가 독자의 미소를 자아낸다. <제이미, 나를 한번 시험해보세요>에서도 남성의 과감한 구애를 요구하는 여성 화자의 대담함이 흥미롭다. <탬 글렌>의 경우 언니에게 연애상담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노골적으로 권유하는 동생의 절실함이 오히려 풋풋하다. <오 스물하고 한 살만 되면, >에서는 아예 드러내놓고 자신이 성인만 되면 사랑을 위해 가족을 떠나겠다는 여성의 과감성이 두드러진다. <멋진 구혼자>는 여성판 <던컨 그레이>에 가깝다.

 

한편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멀리 가 있는 멋진 머슴아>의 여성은 사랑을 위해 집에서 쫓겨나지만 뱃속의 아기와 함께 돌아올 연인을 기다린다. <그레고리 나으리>에서 귀족에게 순정을 바쳤고 그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 여성은 성문 앞에서 간절히 문을 열어주고 자신을 받아주길 애원한다. 한밤중, 폭풍우,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 처절하고 암담한 상황에서 성문은 굳게 닫혀있다. 여성은 남성을 원망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잘못으로 행여 그가 다칠세라 오히려 용서한다.

 

번즈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고향의 인물과 자연에 대한 애호가 남다름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맥퍼슨의 고별>은 배반당해 교수형에 처해지는 한 인물의 당당하고 의연함을 그리고 있다. 맥퍼슨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지만 범상한 죄인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합창의 반영과, 반복적 후렴구 너무도 유쾌하게......”를 통해서 민요조의 노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 죽음이 무언가, 숨 멎는 것밖에?

나 일찍이 수많은 싸움터에서

죽음 앞에 두려워한 적 없으니

여기서도 또다시 그를 비웃네!

너무도 유쾌하게...... (P.36)

 

<내 마음은 하이랜드에 있네>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번즈의 애국심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시작품은 <배녹번을 향한 로버트 브루스의 행군>이다. 브루스의 어조를 빌려 힘차고 통렬한 어조로 그는 애국심의 고취와 반잉글랜드 정서를 한껏 북돋운다.

 

압박의 슬픔, 질곡의 고통,

사슬 매인 자손들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있는 피를 다 쏟더라도

그들을 기필코 자유로우리! (P.104)

 

번즈는 일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그의 시 속에서 가난의 고통스런 자취를 엿볼 수 있고, 가난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더불어 물질적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며, 강인한 평등사상을 품은 시인도 보게 된다.

 

평생 내내 고생이 내 팔자라 하여도

좋은 벗과 한 밤 지내면 그 모두 스러지네.

우리 여행 끝나는 즐거운 그때 되면

그 누구가 지나온 길 생각할 건가? (<적어도 만족하고>에서, P.108)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날은 다가오네, 아무리 그래봐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람이

아무래도 결국은 형제 될 날이. (<아무리 그래도>에서, P.112)

 

이 선집에는 4편의 장시가 들어 있는데, <경건한 윌리의 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죽음과 혼북 의사>, <유별나게 선한 자들에게>, <탬 오섄터>-은 이번에 처음 읽게 된다. <유별나게 선한 자들에게>는 일종의 교훈시라고 하겠는데, 인간사를 너무 엄격하고 가혹한 정의 관념을 가지고 재단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속성으로 너그럽게 이해해달라고 한다. 솔로몬 전도서를 서두에 인용하여 올바른 것도, 똑똑한 것도 지나치면 바보짓과 다름없다며. 이 대목에서 문득 <주홍글자>가 떠오른다.

 

스코틀랜드 민간전승에 대한 시인의 열성적 관심이 초자연적 배경과 사건으로 반영된 작품이 <죽음과 혼북 의사><탬 오섄터>이다. 작품의 경향은 판이하다. 전자에서 화자는 죽음과 맞닥뜨리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의사 혼북의 놀라운 의술로 죽음이 매우 초라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곧이어 죽음의 입을 통해 독자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죽음이 관여한 자연사는 감소할지라도 의사 혼북의 의술 악용으로 인한 사망이 훨씬 늘어날 것임을. 시인의 창작 의도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당대 부적절한 의술에 대한 비판 의도는 확연하다. 다만 화자와 죽음 간 대화가 급작스럽게 끊어지면서 작품도 끝맺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소간 미진함을 느끼게 된다.

 

<탬 오섄터>는 정직한 애주가 탬이 어느 폭풍우 치는 험한 밤에 겪게 되는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보여준다. 온갖 마귀와 마녀들이 모여 한바탕 춤을 추며 노니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 탬. 악마들의 기괴하고 섬뜩한 장면 묘사도 일품이지만, 탬이 한 젊은 마녀의 자태에 매혹되어 정체가 탄로 나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에 실소가 절로 나온다. 성난 악마들에 추격을 간신히 따돌린 탬, 덕분에 암말의 꼬리는 뭉텅이로 뽑혀버렸다. 시인은 말미에 짐짓 교훈조의 몇 마디를 덧붙이지만, 독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마귀와 마녀들의 광란의 무도와, 젊은 마녀 내니를 바라보는 탬의 두 눈이라는 것을. 악마들이 최신 유행의 프랑스 춤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익숙한 여러 춤들을 춘다는 기술은 그네들조차 스코틀랜드 마귀와 마녀이므로 응당 당연하면서도 해학적이다. 앞서 번즈 시의 특징 중 하나가 해학미라고 하였는데, 이 작품에서도 도처에 해학적 요소가 그득 담겨 있다. 술집에 연신 음주에 취해 흥청대는 탬의 모습에서부터 결사적으로 도망치는 탬과 그를 필사적으로 추격하는 내니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그리 행복한 것 보고는 환장하여

수심은 맥주 속에 빠져 죽어버렸지.

벌들이 꿀을 싣고 벌집으로 날아가듯

시간은 즐거움 속에 나는 듯 지나갔네.

왕이 축복받았다면 탬은 영광받았지,

인생의 불행쯤은 죄다 이겨버린 거라! (P.182)

 

, ! , ! 자넨 죄값 받게 됐네!

저들이 자넬 지옥에서 생선 굽듯 할 걸세!

자네 아낸 헛되이 자네 오기 기다리지!

그녀는 곧 슬픔에 찬 과부가 될 걸세! (P.200)

 

옮긴이는 작품 해설에서 번즈의 시가 당대에 성공한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신선한 언어, 빼어난 형식 감각, 민요조의 운율 등. 그의 시는 비판처럼 분명 깊은 철학이나 심오한 사상은 부재한다. 역으로 시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필수불가결한지 되묻고 싶다. 번즈는 오히려 시에 인간을 되돌려주고 있다. 박제화된 언어와 형식을 깨뜨리고, 시를 관념화하여 인간으로부터 멀리하게 만드는 일련의 행동에 대해 그는 온몸으로 저항한다. 시는 이성으로 해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공감해야 하는 예술 존재임을. 그래서 오늘날 그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수록 작품과 번역, 책 구성과 편집, 해설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번즈의 시에 관심 있으면 우선적으로 추천할만한 좋은 책인데 시중에서 절판된 게 무척이나 아쉽다. 참고로 알라딘의 역자 소개는 전혀 엉뚱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 시집의 옮긴이는 당시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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