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리지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지음, 윤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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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 시집을 읽었으니 콜리지 시선을 읽지 않고 어찌 넘어갈 수 있겠는가. 워즈워스보다 콜리지의 인기가 덜함은 시중에 나와 있는 시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한편으론 옮긴이가 워즈워스 시선과 동일인에 기쁜 마음에 이 책을 꺼내든다. 콜리지의 주요 시작품들이 연대순으로 거의 수록되어 있어 한 권만 제대로 감상하면 그의 시세계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으리라. 다만 여전한 아쉬움은 영한 대역이 아니기에 전적으로 번역자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에서 비롯된다.

 

<풍명금>, 이올리언 하프는 초기작임에도 자연의 전일성에 대한 편향이 두드러진다. 애니미즘에 가까운 그의 상념은 후반에 이르러 기독교 전통으로의 급격한 복귀와 대조되는데, 아무래도 초기작이므로 그의 시적 이념이 굳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내 감옥, 이 라임나무 그늘>도 전작과 유사하게 자연 예찬이다. “전일한 생명이 자연 도처에 편재해 있다면 반드시 풍광이 수려한 명승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연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자연의 신비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노수부의 노래>는 특이하게도 라틴어 제사와 산문 방주를 수록하였는데 1817년 판본이라는 점에서 초판본 또는 2판본과의 차이가 있어 이 책만의 독특한 또 다른 재미를 드러낸다. 다만 몇 부분에서 기존의 번역본과는 두드러진 차별성이 존재하는데 원문과 대조해도 이해가 애매하다.

 

그녀의 입술은 붉고, 표정은 거리낌 없고,

머리칼은 황금처럼 누런색이었소.

살결은 문둥이처럼 하얗고,

그녀는 공포로 사람의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몽마(夢魔) 사중생(死中生)이었소. (P.29)

 

<쿠블라 칸>은 여전히 내게 시 자체보다 시작 배경에 대한 작가의 서문이 더 인상 깊다. 에피소드로 과대평가된 미완성 시편이라고 봐야 하리라. 같은 미완성이지만 <크리스타벨>은 훨씬 더 음미할 가치가 크다. 번역본으로는 유일하게 이 작품을 수록한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독자는 제럴다인 양의 정체에 대한 암시를 곳곳에서 알 수 있다. 성문 문턱을 혼자 못 넘음, 성모 마리아 찬미의 회피, 마스티프 종 개의 신음 소리, 갑자기 날름거리는 불길 등. 중세 기사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마녀, 기사, , 음유시인, 수호 정령 등 온갖 탈현실적인 기이한 요소가 시 전편을 휘감는데, 무엇보다 관능과 순수(내지 순결) 간 팽팽한 대립이 현저하다. 작품명이자 작중 주인공인 크리스타벨은 간계나 죄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처녀”(P.102)이다. 마녀는 그녀를 타락시키고 정복하기 위해 그녀의 수호 정령인 어머니의 영혼을 내쫓고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현시킨다. 독자는 알 수 있다. 마녀의 본색이 뱀이라는 점을. 마법에 걸린 크리스타벨은 슈웃 소리를 내거나 눈을 위로 쳐든 모습으로 뱀의 시늉을 하고 있다. 시인은 간밤 꿈에서 비둘기를 괴롭히는 뱀을 본다.

 

중세시대 기독교적 전통과 미덕이 강하게 지배하는 곳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순결이다. 마녀는 순결하고 무구한 크리스타벨에게 젖가슴의 이미지를 통해 관능을 심어준다. 크리스타벨은 마법에 압도되면서도 본능적으로 위험성을 절감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노수부의 노래> 못지않거나 이를 능가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후 수록작들은 <한밤의 서리><나이팅게일>을 제외하면 거의 국내 초역이다. <프랑스-송가>는 자유를 주제로 하여 그의 사상적 이념을 드러내는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이념시라고 하겠다. 자유를 찬미하는 시인에게 있어 자유의 현실적 실현인 프랑스 대혁명은 자체로서 극진한 칭송의 대상이다. 자유 프랑스에 반대하는 반동적 국가야말로 오히려 지탄받아 마땅하다. 혁명 이후의 혼란마저도 불가피한 것으로 시인은 긍정한다. 이런 시인을 분노케 하는 것은 자유 프랑스가 자유 스위스를 침공한 사실이다.

 

나를 용서해 다오, 자유여! , 그 몽상들을 용서해 다오! (P.117)

 

땅과 바다와 하늘에 내 존재를 쏘며

더없이 열렬한 사랑으로 만물을 소유하는 동안,

, 자유여! 내 정신은 그곳에서 너를 느꼈노라. (P.119)

 

시인은 절망한다. 회한에 사로잡힌다. 현실에서 그의 이상은 사라졌다. 이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이상을 의탁하고 발견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이후의 시들은 다소간 재미가 떨어진다. <낙심-송가>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기와 상상력이 저하되고 쇠퇴하였음을 탄식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낙심천만한 치명적 위기이니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만드는 환희를 상실한 까닭이다. <잠의 고통>은 아편의 부작용으로 인한 불면에 시달리는 시인의 처참한 공포와 고통이 뼈저리다. <관념적 대상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사랑의 기억>에 뒤이어 <희망 없는 일>에서도 이른 봄의 깨어나는 활력과 대비되는 자신의 쇠약함에 다시 한 번 낙담한다.

 

빛을 잃은 입술과 화관 없는 이마로 난 배회하고 있으니. (P.155)

 

<윌리엄 워즈워스에게>는 워즈워스의 <서곡> 낭송을 들은 후 감회를 술회하고 있다. 두 쪽에 걸쳐 <서곡>의 주제와 제재들을 열거한 후 친구 시인 워즈워스와 그 작품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는다.

 

성스러운 두루마리인 그대의 작품은

진리의 이어진 노래, 심오한 진리의

연속된 감미로운 노래, 배운 것이 아니라

타고난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곡조를 들려준다오! (P.147)

 

작품을 듣던 순간의 행복한 회상과 상념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두 시인 간의 오랜 친교와 함께 시적 창조력이 고갈되어 씁쓸해하는 시인의 친구에 대한 부러움과 찬미가 혼합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시인으로서의 후년의 자괴감은 그의 <묘비명>에도 여전하다.

 

따뜻한 가슴으로 읽어 주요, 이 무덤 속에

한 시인이, 아니 한때 시인 같았던 이가 누워 있으니.- (P.156)

 

콜리지의 충실한 해설이 이 책의 다른 장점이다. 역자는 초기 시편에서 자유의 이상에의 헌신, 사악한 압제자들에 대한 분노와 순결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인간애, 인간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언급한다. 이어 대화시의 의미와 대화시와 풍경시의 관계, 그리고 대화시의 의의를 상세히 논평하고 있어 유익하다.

 

대화시가 다른 한편으로 17.18세기 풍경시의 전통 속에 자리해 있음을 시사한다. (......) 시적 상상력에 의해 주체와 대상, 정신과 자연 간에 뜻깊은 관계를 맺어 주는 상징적 지각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18세기 풍경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P.161)

 

대화시의 철학적 핵심은 바로 이 생명의 전일성에 대한 신념이다. (P.161)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노수부의 노래>에서 단순한 괴이한 항해담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재한 악의 성격에 관한 진지한 탐색의 기록”(P.163)임을, 시인이 여기에 스스로의 고통, 두려움, 죄의식, 회한, 무력감 등의 감정을 투영했음을 밝히고 있다.

 

<크리스타벨>에서도 이 시의 매력은 표층적인 고딕 로맨스의 요소들보다는 여러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순수와 관능, 외관과 실재 간의 모호한 상호 관계 또는 양가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콜리지의 노력에서 비롯된다.”(P.165)고 하여 작품의 성격과 의의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요컨대 이 책은 원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주요 작품의 수록과 상세한 해설로 콜리지의 시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꽤나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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