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고 장영희 선생의 유고집이다. 2010년 작고 1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 상업적 고려보다는 순수하게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갸륵한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죽어서도 이렇게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니 선생은 행복한 사람이다. 책은 전형적인 선생의 책 스타일 그대로 나왔다. 예쁜 표지에, 꽃과 새를 그린 아름다운 그림들이 책장 곳곳에 숨어있다. 선생이 보았다면 좋아서 감탄하였을 듯하다.

 

전체 3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의 부제는 장영희가 사랑한 사람과 풍경으로 이미 출간된 두 권의 책 <내 생애 단 한 번>,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과 같이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앞서 나온 책들에 미처 담지 못한 신문 에세이와 칼럼에 실은 글들이다. 내용은 이미 충분히 어떠하리라고 짐작 가능하다. 선생의 글쓰기 소재는 본인 말마따나 제한적인 편이며, 글쓰기 방향도 사랑, 자기반성, 세태 유감, 장애 또는 수업 관련 일화 등이다.

 

자꾸 만 커지는 이 세상에 나의’, ‘우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 부모님, 우리 학생들, 우리 이웃들,...... (<나의 안토니아>에서, P.33)

 

그 위대한 순간은 우리가 모르는 새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생각하는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무심히 건넨 한마디 말, 별 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순간은 온다>에서, P.39)

 

물론 지금 당장 나의 편리, 나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 단지 우리 학생들에게 내가 만약 저 사람이라면 얼마나 슬플까......’를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을 가르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저 사람이라면>에서, P.90)

 

하면 된다라고 아무리 아우성쳐도,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둥근 새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라고 생각하는 지혜가 새롭다. 때로는 포기도 미덕이기 때문이다. (<‘둥근 새동화가 일러준 포기의 지혜>에서, P.118)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너무나 쉽고 간단한데, 진정한 삶은 늘 해답이 뻔한데, 왜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신문에 없는 말들>에서, P.141)

 

선생의 팬이라면 다시 한 번 작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반가울 것이며, 뜨내기 독자라면 비슷한 반복이군 하며 심드렁하게 반응할지 모른다. 아름답고 신선한 것도 익숙해지면 새로운 놀람의 빛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듯이. 그럼에도 선생의 글을 읽는 것은 여전한 즐거움이다. 무시하고 외면하거나 이미 잊어버려서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예쁘고 순수하며 마음 따스하고 뭉클한 여운을 안겨주는 감성과 상념들. 자신을 한없이 부족하고 결점 많은 항상 잡다한 현실에 허덕이며 후회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 독자들은 안다. 선생만큼이나 투명한 영혼을 지닌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개인적인 글을 제외하면 아울러 선생 자신이 번역하거나 주목한 문학작품에 대한 전반부의 글이 인상 깊다. 앤 타일러, 카슨 매컬러스, 윌라 캐더 등의 작가가 쓴 작품들을 불현 듯 읽고 싶은 충동이 인다.

 

2장은 장영희가 사랑한 영미문학이란 부제인데 일간지의 문학 칼럼에 게재하였던 글들이라서 글쓰기 형식이 고정화되어 있다. 유명한 소설 또는 시의 일부를 영한 대역으로 싣고 짤막한 해설 내지는 작자의 감상을 덧붙이고 있다. 주로 시 작품을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전에 나온 문학 소개서와는 의외로 중첩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 세어보니 모두 30편이다. 이와 세어보는 김에 1장도 세었더니 여기는 29편이다. 유달리 기억에 남는 작자의 해석 이야기를 아래 언급한다.

 

혼돈의 시대, 영혼의 불모지에서도 꺼지지 않는 개츠비의 낭만적 이상주의를 피츠제럴드는 위대함으로 보았던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P.167)

 

시인이 글자와 글자 사이에 ‘ll’로 네트를 쳐놓은 것은 우리 사이에 네트가 너무 많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겠지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질시와 무관심과 불신의 네트 말입니다. (<40 Love>에서, P.223)

 

스스로를 크게 키운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한껏 마음이 커져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생명에 감사할 줄 알고, 세상의 치졸함과 악을 뛰어넘을 줄 알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고, , 그리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내 마음속의 위대함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요. (<새해 생각>에서, P.251)

 

마치 이 복잡다단하고 누추한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4차원의 세계로 옮겨간 듯, 나와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을 물에 담가 깨끗이 씻듯 맑고 신성한 순간입니다. (<2월의 황혼>에서, P.263)

 

마지막 장은 선생에 대한 추모사들과 선생을 추억할 수 있도록 사진과 약력 등이 추가하여 글로만이 아닌 눈으로도 선생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배려한다. 이해인 시인의 추모시와 박완서 작가의 추모글을 통해 선생의 교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목소리와 내심을 글을 통해 여럿 보았는데 이제 사진으로도 보게 되니 묘한 느낌이 든다. 오랜 펜팔 친구의 사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이 책 이후에도 선생의 이러저러한 글들을 모아서 수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지만 더 이상은 보지 않을 생각이다. 선생이 직접 세상에 영원히 드러내고 싶은 글들은 진작 책으로 나왔고 유고집도 나온 마당에 더한 것을 바라고 탐냄은 과욕일 것이다. 차라리 선생이 직접 번역한 문학작품들을 읽어보는 게 선생에 대한 예의이자 선생을 보다 잘 이해하고 가슴 가까이 추억하는 방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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