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국사책에는 하멜에 관해 간략한 기술만 언급된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류했는데 십여 년간 억류되었다가 일본으로 탈출하였다라고. 그리고 벨테브레(우리 이름으로 박연)도 함께 언급한다. 우연찮게 읽게 된 이 책을 통해 새삼 하멜을 포함한 화란인 선원들이 조선에 오게 된 연유, 그들이 조선 땅에서 보고들은 것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를 되짚어 보니 그네들의 표류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책에 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하멜의 기록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과 개인 문집 등의 자료를 토대로 보완하여 하멜의 조선생활을 재정리하였다. 부록으로 하멜표류기의 본문 번역을 수록하고 있다. 17세기 이방인이 남긴 많지 않은 기록만을 가지고 현대의 우리가 내용 이해와 공감을 갖기란 부족할 것이다. 저자는 이 점에 착안하여 단지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표류기를 다시 쓰고 있어 하멜의 표류와 탈출 이후까지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좋은 기획이다.

 

하멜 일행이 무려 13년간이나 조선에 억류되었던 사연이 먼저 궁금하다. 그네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인도적 배려였을까 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행위였을까? 인도적 고려라고 호의적으로 보기엔 이후 그네들에 대한 처우와 궁핍한 나날이 설명되지 않는다. 통행 자유를 일정 부분 허용하면서 동래 왜관에 접근 금지령과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마다 원근 지역으로 소개된 사실 등을 보았을 때 정치적 목적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앞선 벨테브레와 같이 소위 남반국의 무기와 기술을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북벌 정책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화란인들의 신분과 지위는 무엇일까? 포로, 죄인 아니면 난민? 응당 난민으로 간주되어야 하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네들을 희망에 따라 일본으로 보내지 못했다면 최소한 조선에서 정착시키기 위한 법적, 제도적 지원이 뒤따라야 할 텐데 매우 미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신경 쓰인다고 전원 죽일 것인가를 무려 사흘간이나 조정에서 논의했다는 자체가 어이없다. 게다가 소위 좋은 사령관, 나쁜 사령관이라는 하멜의 기록처럼 지방수령의 개인적 성향과 방침마다 그네들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을 보인다.

 

화란인들은 어쨌든 십년 이상이라는 기간 동안 조선에 정착하였다. 그네들이 불현 듯 조선 땅을 떠나게 계기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다. 기록을 보면 하멜 일행은 분명히 정착의도를 지녔다.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고 타협을 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1656년에 도성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전라병영에 정착한 후 1663년에 분산 수용되기까지 그네들은 7년간 한곳에 정주하였다. 그들이 분산수용된 것은 수년 간 지속된 장기 흉년의 여파였다.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을 몹시 슬퍼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곳에 정착해서 이 나라 방식에 따라 집과 가구, 작은 정원 등을 살 만하게 장만해 왔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장만하느라 힘깨나 들었는데, 이제 다 버리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P.248)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은 이들도 있었다고 하니 분명히 그네들은 조선에 영구 거주할 의향도 다분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네들에게 탈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그렇다. 그들은 포로도 죄인도 아닌데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일생을 노예로 살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각오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이 배를 구하고 탈출하여 나가사키 항에 들어가서 일본 관리를 대면한 장면은 이전 조선의 사례와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무려 53항목에 달하는 질문을 두 번 반복하였던 것인데 화란인들에 대한 것은 물론 상당수가 조선의 현황과 정세에 관한 철저한 조사와 심문과정이었다. 당대 조선과 일본 양국의 국가 역량의 차이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

 

하멜이 남긴 기록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대체로 사실에 근거하여 신뢰성이 높은 편이다. 그는 위로는 임금에서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층의 당대 조선인들을 만났다. 표류기 자체는 물론 별도의 조선왕국기를 읽다 보면 마치 인류학자가 미지의 원시 부족들을 방문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지니고 충실한 인류학적 문명기록을 후세에 전승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서양인의 시각을 통해 수백 년 전 선조들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게 되니 생경과 친숙이 공존하는 낯선 문명을 접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코레시안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들은 되지 못합니다. 남을 속여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그들은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입니다......그들은 피를 싫어합니다.” (P.292)

 

매우 적확한 관찰이며 요즘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하멜 일행이 조선인들을 깔보고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듣기 잘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우리 말을 믿게 할 수 있었습니다.” (P.292)

 

모처럼만에 읽은 좋은 책이다. 먼지 쌓인 고전에 숨결을 불어넣은 저자 겸 역자에 감사를 표한다. 독자는 대수롭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이런 책을 쓰기까지의 헌신과 연구는 지난하였으리라.

 

문득 하멜 일행이 벨테브레(박연)과 상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역만리 미지의 나라에서 생사를 점칠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순간에 대면한 같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동향인의 존재. 참으로 반가우면서도 한없는 감사의 념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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