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18
헨릭 입센 지음, 김창화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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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은 민음사 번역본 후 다시 한 번 읽는다. <유령> 역시 이 책과 이후 동서문화사 번역본을 연달아 읽었다. 재독은 작품에 대한 친숙한 느낌과 동시에 생경한 대목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첫 읽기와 다른 이해, 첫 읽기에서 간과한 장면을 새삼 음미할 수 있다. 한편 완벽한 번역본은 없다는 씁쓸한 진실도 발견한다. <인형의 집>은 이미 단상을 남겼으므로 여기서는 <유령>만을 다룬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전작과 대비된다. 전작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성격 면에서 한층 복잡하게 엮여있다. 이 작품을 통해 전작을 거슬러 살펴보면 여러 면에서 다소 나이브하였음을 알게 된다. 후반부의 주제를 향한 박진감 넘치는 돌진도 새삼스럽다.

 

<유령>의 주제의식은 다음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제시된다.

 

우리 모두가 유령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뿐 아니라 모든 낡은 이론, 낡은 신념, 낡은 사물들이 우릴 따라다녀요. 살아 있는 건 아니지만, 떠나지 않고 우리 몸에 박혀 있지요......이 나라 전체에 유령들이 사는 것 같아요. 너무 많아서 바닷가의 모래처럼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불쌍하게도 빛을 싫어하죠.” (P.188)

 

유령오래된 관습내지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생각”(P.233)을 지칭하는 용어다. 입센이 보기에 당대 노르웨이인들은 모두가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자유롭고 눈부신 새로운 시대와 세상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것을 막는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인습 같은 장애요인.

 

입센은 구시대와 신시대를 날씨를 통해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고 돌아온 오스왈드의 절망을 통해 형상화된다.

 

하루 종일 햇빛이라고는 안 줌도 없는데?” (P.201)

햇빛은 한 번도 볼 수 없어! 내 기억에 여기서 햇빛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P.208)

 

유령은 햇빛을 싫어한다. 유령에 사로잡힌 이들은 삶의 기쁨과 행복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삶은 그저 감내해야만 할 의무일 따름이다. 만데르스 목사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현현이다.

 

삶의 기쁨에 관해서 얘기했죠. 여긴 그 기쁨이 별로 없어요. 난 여기서 그걸 느끼지 못했어요.” (P.214)

언제나 끝없이 이 기쁨을 그렸어요. 바깥세상에는 빛이 있고, 햇살이 있어요.” (P.215)

 

오스왈드의 최후 장면에서 그가 반복하여 햇빛을 갈구하는 것은 입센의 절박감과 초조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햇빛.....햇빛을.” (P.241)

 

<유령>의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이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위선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만데르스 목사는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관습에 젖어 있는 인물의 전형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 세인의 반응에 예민하다.

 

부인,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다 세상 사는 방법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죠.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P.151)

 

사람들에게 오해를 심어 줘서도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살 일을 해서도 안 되죠.” (P.155)

 

고아원 건물의 보험 가입에 대한 그의 주저는 후일 화재의 참극을 예고한다. 게다가 알빙 부인의 결혼 관계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며, 개인의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의 울타리는 지켜야 한다는 가치관도 그의 고루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언제나 인생에서 행복만을 찾으려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이에요. 어떤 권리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죠? 없어요. 우린 오직 우리의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부인의 의무는 부인이 선택한 남편 곁에 있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인연으로 묶인 바로 그 사람과 함께.” (P.167)

 

만데르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어머니로서 아들의 이상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알빙 부인: 진실은 어쩌고요?

만데르스: 이상은 어쩌고요?“” (P.185)

 

알빙 부인은 끝내 가정을 깨뜨리지 못한 노라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닌 비교적 깨인 인물이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끝내 비극을 감수하는 처지를 자초한다.

 

타락한 남편을 보여주기 싫어서 어린 아들을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과 아들을 속이는 행동이었음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아들의 눈에는 알빙 부인 또한 유령의 일원으로 보인다.

 

엥스트란드의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허위와 위선은 말할 것 없고, 레지네의 태도 반전은 극적이다.

 

나도 인생의 기쁨을 찾고 싶어요, 부인......아무려면 어때요. 될 대로 되라죠.” (P.231)

 

착하고 얌전한 듯 보이는 레지네는 실상 삶의 열정과 기쁨을 향유하려는 욕망으로 펄펄 끓는 젊은 아가씨였다.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알빙 부인 자택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그녀의 태도는 당당하면서도 일말의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녀가 만약 엥스트란드에게로 향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작품 전개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고아원 화재의 원인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극중에서는 만데르스 목사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만데르스 목사가 실화자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엥스트란드: 하지만 난 분명히 봤습니다, 목사님. 등불을 받아 손으로 심지를 끊어서 등불을 끄시고, 그 꺼진 심지를 대팻밥이 쌓여 있는 곳에 버리셨어요.” (P.221)

 

만데르스: 끔찍하군! 부인, 이건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집에 대한 심판입니다.” (P.218)

 

엥스트란드의 증언에 더하여 목사 자신의 발언은 나아가 방화의 의도마저 풍긴다. 만약 방화로 확인된다면, 목사에 대한 저간의 평가는 재논의가 필요하리라.

 

한편, 엥스트란드도 용의선 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만데르스 목사의 실화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이며, 이를 기화로 목사를 자신의 목적에 동의하도록 은근히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공사장에서 화재가 생길 뻔했고 엥스트란드에게 혐의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 말로는 가끔씩 그가 성냥불을 아무데나 버린다더군요.” (P.156)

 

이를 확대 적용해 보면 엥스트란드는 실수든 고의든 고아원 화재의 원인자인데 이를 목사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마지막으로 고아원과 선원의 집의 명칭에 담긴 역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알빙 부인이 세운 고아원의 명칭은 알빙 대위 기념관이다. 겸손한 미덕 속에 감추어진 허위를 인식하자. 반면 엥스트란드는 선원들의 집을 알빙 대위의 집으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인다. 타 번역본에서는 의전[시종] 장관 알빙의 집으로 번역한다. 영문판으로는 Chamberlain Alving's Home으로 표기되어 있다. 의전 장관 알빙은 타락한 인물이다.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타락한 진실이다.

 

작품해설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 그리고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과거와 현재의 <관념적 유령>에 희생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P.251)”

 

<인형의 집>의 노라는 유령을 뿌리치는 데 성공한 반면, <유령>의 알빙 부인은 유령을 극복하는데 실패한다. 그것이 이 작품이 비극으로 자리매김하는 연유다. 하지만 <유령>을 단선적으로만 파악하기 보다는 주제 구현을 위한 갖가지 상징과 복선 장치, 인물들의 다면적 성격의 충돌과 대립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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