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시나 일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다카스에의 딸 지음, 정순분.김효숙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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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서 예전의 생을 회상할 때의 심경은 차라리 참혹하다. 자신의 삶 전체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청령일기>와 비슷하나, 남편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점에서 진정한 회상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는 모노가타리의 세계에 매료되어 현실적 삶의 인식을 갖지 못한 점을 못내 후회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 속의 화려한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부 군상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히카루겐지님처럼 신분이 높고 멋진 분을 만나면 좋겠다.” (P.102)

 

이들의 공통점은 환상과 가공의 세계에 익숙하여 현실 세계에 불만스러워하고 외면하여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데 있다. 현실은 녹록치 않다.

 

히카루겐지님처럼 멋진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말이다.” (P.142)

 

처절하면서도 씁쓸한 깨달음이다. 세상에 신데렐라가 있을 수 있지만 누구나 신데렐라가 되지는 못한다. 이처럼 작자에게 모노가타리는 현실 인식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짙은 폐해를 드리웠다.

 

일기의 첫부분은 형식상 기행문, 즉 여행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도쿄 동부에 해당하는 가즈사 지방에서 당시 수도였던 오늘날의 교토인 헤인안쿄까지 수 개월간 육로와 수로를 거쳐 귀경하는 대목이다. 해설에서는 <도사 일기>와는 달리 풍경 기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므로 본격적인 기행문학으로서 평하고 있다.

 

1부를 일종의 구도기행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작자는 모노가타리에 대해 듣고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하루빨리 귀경하기만을 고대하며 신불에 기원할 정도다. 작자가 귀경길에 언급하고 품평한 명소들도 기실 와카라든지 문학에서 회자된 곳이다. 문학적 감성이 충만한 십대 초반 소녀의 입장에서 헤이안쿄로 가는 길은 모노가타리 독서에 가까워지는 길에 다름 아니다.

 

작자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3세에 결혼한다. 십대 후반이 결혼 적령기인 당대로서는 상당한 만혼이다. 비슷한 나이였던 때 세이쇼나곤은 스스로를 할망구라고 지칭하였다. 만혼의 사유로서는 가정적인 연유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작자의 현실 인식의 미흡성이다. 작자는 모노가타리를 탐독하고 파묻혀 지내는 나날을 보낸다. 남들처럼 혼인에 적극적이지 않고 참배나 근행도 무심하게 여겼다. 오죽했으면 스스로 예지몽을 꾸어도 아무 생각 없었다고 반복적으로 술회할 정도이다.

 

모노가타리의 삶은 현실에 부재하다는 각성은 쓰라린 자각과 체념을 불러일으켰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나이든 자신의 모습과 남편의 존재가 인식되었다. 스케미치와 길고도 짧은 대화는 스러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일렁임이라고 해야 하리라. 꿈은 비록 잃었지만 노년의 심리적, 경제적 안정을 기대하였던 다카스에의 딸, 그에게 닥친 운명은 남편의 죽음이었다. 남은 것은 후회와 회한, 내세의 기원뿐.

 

이 작품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해설에 잘 요약되어 있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자기 성찰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자전 문학으로서 가치 또한 높다......저자의 정신적 성장과 편력을 엿볼 수 있고 주제 구성을 위한 창작 요소가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회상록 혹은 자전 문학으로서 독자성이 인정된다.” (P.236)

 

이 책은 각 단마다 번역문, 각주, 해제의 순서로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어 내용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해설 외에 유용한 부록을 여럿 담고 있다. ‘헤이안 여류 일기 문학의 흐름은 헤이인 시대 일기 문학의 개요를 조망할 수 있으며, ‘<사라시나 일기>의 귀경 여행은 작품 중에서 특히 귀경 여행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첨부된 귀경 여정 지도는 기행문에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것으로서 글월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여행의 전반적 여정과 지리적 위치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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