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대장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125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정형 옮김 / 소명출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 어려운 책이다.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우선 책을 찾기가 만만찮다. 대형서점에 가더라도 반드시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어렵다. 게다가 명색이 고전소설이지만 문학 서가가 아니라 인문학 서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인터넷서점 이용이 훨씬 용이하다. 책 자체는 어떠한가? 학술서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중량감 있는 단단한 양장본에 574쪽의 두께, 다소간의 관심 있는 독자의 지갑마저 망설이게 만드는 가격(현재는 50% 할인행사 중이므로 사정이 낫다). 책장을 슬쩍 넘겨보면 빽빽한 조판과 세세한 각주는 역시 소설보다는 학술서를 상기시킨다. 본문은 330쪽까지이며, 이후는 원문 영인본을 수록하였다. 역시 일반 독자보다는 연구자를 위한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호색일대남>과 <사이카쿠가 남긴 선물>에서 이하라 사이카쿠는 근세 조닌 계층의 호색과 유곽 풍습을 소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겼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조닌 계층의 문화를 일부 이해하게 되었지만 조닌은 무엇보다 상인이다. 조닌의 본령을 알려면 장사와 거래와 관련된 상인으로서의 성공과 실패, 애환을 살펴봐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일본영대장>은 독특하면서도 의의가 큰 작품이다. 옮긴이는 이 작품을 일본 최초의 본격 경제소설(P.3)로 칭하면서 “상인의 입신출세담이나 파멸담을 통해 금은만능의 조닌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날카롭게 묘사”(P.6)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 소설은 전체 6권인데, 각 권마다 5편씩이니 총 3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은 대체로 전반부에 일반론적 교훈이나 설교, 후반부에 실제 사례 형식으로 구성된다. 각 편에 한 명에서 여러 명의 상인들의 일화나 일대기가 소개되어 있으므로 등장하는 조닌들의 수는 수십여 명에 해당한다. 이들의 상업적 스토리는 지역적으로 일본 전체를 포괄하며, 성공과 출세, 실패 후 재기, 성공 후 실패, 당대 성공 후대 실패 등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제시되어 있다.

 

사이카쿠의 특징은 매우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그의 인물은 순전한 허구적 존재가 아니라 실존 인물을 살짝 변용한 경우가 대다수이며 따라서 일화도 실제 발생하였던 사례다. 인물의 대화는 현실에서 상인들 간에 주고받거나 충분히 발언했음직한 내용이다. 상업거래의 화폐 단위와 금액도 당대 시세를 반영하여 꼼꼼하게 계산하고 있다. 이로써 독자는 작중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게 되며, 인물과 일화의 사실성은 흥미를 유인하는 효과를 갖는다.

 

다양한 업종에 여러 노력과 수단으로 부자, 즉 장자(長子)가 될 수 있지만, 부자들의 공통점은 분명 존재한다.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라고 하겠지만. 게다가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하듯이 부를 쌓기는 어려워도 낭비하는 길은 쉬운 법이니 경계해야 할 타산지석의 사례도 여럿 볼 수 있다.

 

- 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요행은 반복되지 않으며, 어긋난 마음가짐은 사필귀정으로 이어진다.
  : 권3-3, 권3-4, 권4-4 등

 

- 적절한 사업 아이템 발굴이 중요하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하찮은 기회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
  : 권1-1, 권1-5, 권2-3, 권2-4, 권3-1 등

 

-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고 반드시 사업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부자는 운도 따라야 한다. 거부는 어찌 보면 하늘이 내린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거부가 될 수는 없으니 소부라도 되려면 그래도 본인의 능력을 믿고 게으름 없이 노력할 수밖에.
  : 권2-2, 권3-4, 권5-1, 권6-2 등

 

-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자세가 중요하다. 성실과 정직은 장사뿐만 아니라 세상사의 필수 요건이다. 허상에 빠지지 말고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직시해라.
  : 권2-5, 권3-4, 권4-2, 권4-3, 권4-4, 권6-3, 권6-4 등

 

- 사업에 실패해도 실의에 빠져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업하는 사람치고 위기와 실패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 권4-2 등

 

- 작은 돈도 소중히 여기고 근검절약해야 한다. 사치는 나라도 기울게 한다. 구두쇠를 인색하다고 비웃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오히려 합리적 소비관을 지녔다.
  : 권2-1, 권3-1, 권3-2, 권4-5, 권6-1, 권6-4 등

 

- 자식 교육에 힘쓰지 않으면 부는 2대를 넘기지 못한다. 창업주의 각고노력을 자식은 알지 못한다. 더구나 장사에 전념하다보면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데는 소홀하기 마련이다.
  : 권1-2, 권5-3, 권5-5, 권6-1 등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한 근세 일본 사회는 부의 축적과 아울러 자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따라서 현세에서 부자가 된다면 후세의 지옥도 꺼리지 않을 정도로 조닌의 금전욕은 불타올랐다(권3-5). 제아무리 뛰어난 예능인이라도 궁핍하다면 상인의 가치관에서는 무능력자에 불과하다(권6-2). 존중할 만한 장자도 있는 반면 비양심적, 천박한 졸부의 폐해도 많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고의파산 사례가 전형적이다(권3-4, 권6-4).

 

진정한 장자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돈이 많은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제대로 일을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권4-1, 권6-4). 돈이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도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건강하면서 자기 분수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큰 부자가 되는 것보다 좋은 것이다. 집이 번창해도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거나 부부가 헤어지게 되면 잘 안 풀리게 되는 데 이런 것이 세상사이다.” (P.288)

 

마지막 편의 세 부부 가족 사례(권6-6)는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자와 조닌의 모습으로 판단된다.

 

이 책은 통속소설이다. 내용도 근세 일본의 조닌들의 실제적 치부와 파산 사례를 담고 있어 제법 흥미롭다. 반면 저자와 출판사는 이 책을 고전 저작으로 접근하고 있다. 편집 자체도 딱딱하여 학술서적에 가까운데 상세한 각주는 오히려 가독성을 저하시킨다. 국내에 최초 소개되는 작품이니만치 학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소설작품은 소설다운 느낌이 나야 제 맛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