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8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소화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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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한창이던 어느 날 문득 서릿발 같은 바람도 잠잠해지고 하늘도 맑게 갠데다 제법 햇볕도 온화한 기색이 깃들인다. 성미 급한 봄꽃들은 이제야 봄이 진군을 시작했나보다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리거나 부풀리기에 힘쓴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혹한이 휘몰아치고 칼날 같은 위세에 절로 옷깃을 여미기에 급급해진다. 여린 꽃잎들은 그대로 얼어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봄을 머금은 망울은 속절없이 얼어붙은 채 겨우내 소망이 부질없어진다.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던가. 아직 진정한 봄은 이르지 않았건만 봄을 기대하는 어린 영혼들은 거리에 뛰쳐나가 꽃샘추위에 몸을 덜덜 떨고 만다. 시마자키 도손의 <>을 읽는 심정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의 봄을 다루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상의 봄예술의 봄인생의 봄. 작가의 말이 어느 정도나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 소설은 봄 자체를 그린 소설이 아니다. 한겨울에 봄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젊은 영혼들의 울분과 좌절을 기술한 소설이라는 게 보다 적합한 의견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편을 면면히 흐르는 기조는 어둡고 차분하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다. 멀리서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전혀 알 수 없기에 희망도 빛도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 기시모토의 방랑과 아오키의 발병으로 가시화된 겨울의 절정은 기시모토의 이루지 못한 죽을 결심과 아오키의 자결로 이어진다. 현실의 생기에 넘치는 봄과 인물들의 대비가 강렬하다.

 

방 밖에선 오후의 햇볕이 반짝이며 넘실거려서 왠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거리의 수목들조차 지금은 새로운 잎으로 갈아입을 때로, 그 푸르고 밝은 색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부셨다. 모든 만물은 생기에 넘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었다.” (P.229)

 

작품 전편의 주인공은 물론 기시모토 스데키치지만, 그의 비중은 전반부에서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전반부에서는 그의 문학적 친우들인 아오키, 스게, 이치카와의 신변과 사고가 보다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특히 아오키의 굵고 짧으면서도 강렬한 삶은 인상적이다.

 

아오키를 비롯한 친우들의 소망은 근대화를 추구하는 19세기말 당대 일본이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문화 및 지성에서 보다 개화되고 계몽된 사회로 발전해 나가도록 자신들이 일조를 하고 그 성취를 목도하는데 있다. 하나 뿌리박힌 인습과 고루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인들을 일거에 문화인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과업이었으면, 그들의 몰이해와 저속함에 고매한 이상과 깊은 감성을 지닌 젊은 영혼들의 좌절은 예견된 결과나 다름없었다. 세상은 그들이 자신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도록 용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오키는 분투하다가 꺾였”(p.264)으며, 다른 친우들도 각자 나름의 행로를 밞아나가게 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를 생각해야만 된다. 10, 20년 뒤에도 보일지 어떨지 모르는 청년의 꿈을 지금 보려고 해 봤자 그렇게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다.” (P.300)

 

함께 젊은 생명의 싹을 피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같은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벌써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으로 각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는 왠지 슬펐다.” (P.306)

 

작중에서 기시모토의 방황은 분명한 사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은인의 집에서의 가출과 두 번에 걸친 방랑이 참을 수 없는 당대에 대한 반기의 의사표시 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처절한 위안의 발로라고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품 <><파계>의 성공 이후 발표된 작품임에도 그의 중요 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단초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전편을 관통하는 기시모토의 애매한 행위의 모호한 동기. 반면 기시모토의 심경을 다르게 파악해 볼 수도 있다. 그는 작중에서 문학과 미술에 다소간 재능을 가졌으며 원체 다정다감하여 눈물을 곧잘 흘리며 연약한 의지력을 지닌 인물로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말수가 적은 것으로 묘사된다.

 

전반부의 열의에 찬 청년들의 격정적이며 확고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후반부에서는 무게중심이 기시모토의 진퇴양난의 처지와 우유부단한 내적인 고민으로 침잠한다. 맏형의 수감으로 졸지에 집안 생계를 떠맡게 된 기시모토의 분투와 괴로움.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아직 미숙한 청년에 불과하며 삶의 최전선에 뛰어들고자 하는 의사도 취약하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마저 포기하면 가족들은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기시모토는 가쓰코의 죽음을 듣고 더욱 침울해졌다. 어느 때는 일할 마음도 없었다. 때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있었다. 형수가 있었다. 불행한 형이 있었다. 아이코가 있었다. 그가 일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먹는 것조차 곤란하다.” (P.294)

 

식구들은 구할 수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P.315)

 

반면 아오키의 분사에 자극받은 그의 정신은 포도청 같은 나날의 생계를 떠나서 확고한 방향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이상과 영혼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도록 요구한다. 가족에 대한 의무와 개인의 자아실현에 대한 갈망의 상충이 빚어내는 긴장과 갈등, 고뇌와 가쓰코의 사망에 따른 심적인 동요와 상실감은 기시모토를 점점 외지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과거의 추억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하나 천진한 어린 시절의 허위성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케노하타라면 이전에는 날아서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점차 기시모토의 발길이 뜸해졌다. 가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재미가 없었다. 언제나 잠자코 물러앉아 있다 온다.” (P.298)

 

그는 많은 것들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P.316)

 

작품의 말미는 다소간 싱겁다. 그는 센다이의 학교 교사로 떠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가족의 생활비는 멀리 있는 둘째형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 마음 놓고 자신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의 독립과 발전을 도와주지 못하는 가족의 족쇄, 꽉 조여 오며 벗어날 길 없을 것처럼 단단한 수갑을 작가는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벗겨낸다. 기시모토의 그동안의 처절한 고민과 심적 전투가 읽는 이로 하여금 무안할 지경으로.

 

,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P.370)

 

끝 대목에서 차창 밖을 스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읊조리는 기시모토의 생각이다. 혹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청년들이여, 아무리 절망과 좌절이 깊더라도 결코 자신을 버리거나 버리지 말라. 당장은 봄이 이르지 않더라도 어떻게라도 인내하고 버티어 살아가다 보면 가까운 시일에 봄이 성큼 다가옴을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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