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사메 모노가타리 일본명작총서 8
우에다 아키나리 지음, 조영렬 옮김 / 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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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피 묻은 휘장

아마쓰 오토메

해적

2세의 인연

외눈박이 신

죽은 목의 미소

스테이시마루

미야기의 무덤

노래의 명성

한카이 (/)

 

이 이야기책은 우에다 아키나리의 유작이다. 작가는 최만년에 일단 완성을 하였지만 간행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손질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후 이 작품은 몇 편만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외에 오랫동안 망실된 상태에 놓였다가 1951년에 원고가 발견되어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나름 사연이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생전에 발간되어 그의 명성을 높여준 <우게쓰 이야기>와 비교하면 참으로 독특한 면모를 보게 된다. 모노가타리의 우리말 번역을 이야기로 쓰는 것은 모노가타리가 이야기로서의 분명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타당성이 있다. 고전 형태의 소설로 간주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물론 우타 모노가타리처럼 이야기가 부차적 요인이 되는 유형도 존재하지만 주류는 아니다. <우게쓰 이야기>는 문학적 서사로서의 모노가타리 속성에 충실한 반면, 30년 후의 이 <하루사메 모노가타리>는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옮긴이가 작품 해석을 의지한 나카무라 히로야스의 글이 세간의 인식을 대표한다고 보겠다.

아키나리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연구 과정에서 산출된 결과물을, 학문이라는 닫혀 있는 울타리에서 추출하여 모노가타리라는 열린 구조 속에 풀어놓았다.” (책 뒤표지)

 

작가는 이야기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단편들은 그의 역사 탐구와, 와카 연구와 고전 사상의 이해 도정에서 (주관적 관점에서) 의문을 품거나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당대의 주류적 사상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모노가타리 형식을 차용하였다. 작가는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별 관심이 없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야기로서의 구성적 미결성과 내용적 미진성에 불만을 느끼게 됨은 당연하다.

 

 

1. <피 묻은 휘장>은 헤이안 시대에 벌어진 구스코의 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 난을 일으킨 악역을 나카나리와 구스리코 남매에 뒤집어씌우고 헤이제이 천황은 여기에 직접적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의도적으로 사실(史實)을 곡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헤이제이 천황의 성격이 선하고 온유하며 사욕이 없고 존귀하다고 평한다. 이러한 천황의 눈과 입으로 유교와 불교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유교가 건너와, 성인의 현명한 가르침 덕에 악을 선으로 고쳤는가 보니, 도리어 사실을 왜곡하고 말을 교묘하게 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졌는데,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나는 책 읽는 일에 어두우니,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을 쏟으리라.” (P.22)

 

유가의 천()은 너무 여러 갈래이다. 불씨는 천제도 머리를 기울이고 불법을 들으셨다고들 한다. 참으로 번거롭구나.” (P.27)

 

 

2. 이 작품은 뒤의 <아마쓰 오토메>와 연계하여 이해할 때 의미 파악이 용이하고 명료해진다. 작가가 앞서 헤이제이 천황을 일부러 높이 평가한 의도는 뒤의 사가 천황과 대비하기 위함이다. 헤이제이 천황은 일본 고유의 미덕을 갖추었고, 사가 천황은 중국의 문물을 모범으로 삼고 준수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이 작가 아키나리의 사상적 견해로는 못마땅했던 듯하다. 왕희지의 진적 관련 에피소드는 작가의 풍자적 비꼼을 보여준다.

 

“......온 나라의 국토마저 중국풍으로 바뀐 듯하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P.36)

 

“......오직 유교의 예법만이 채용되었다. 그렇지만 불법은 전혀 쇠퇴하지 않았고......정사가 자연히 그들의 가르침에 이끌려 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P.39)

 

불도는 여전히 융성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유교도 아울러 행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레의 한쪽 바퀴가 얼마간 손상되어, 가는 것이 더딘 듯이도 보였다.” (P.41)

 

우키나리는 여기서 와케노 기요마로와 요시미네노 무네사다의 생의 여정을 비교하여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충직한 기요마로는 정권을 틀어쥔 요승 때문에 좌천과 유배로 점철된 삶을 보낸 반면, 무네사다는 재능과 학식이 있지만 유흥과 노래로 천황의 총애를 받다가 천황 붕어 후 도망치듯이 출가하였는데 나중에 승직의 최고위인 승정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탄식 한 줄에 작가의 내심이 절절히 드러난다.

 

불도라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헨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터이다.” (P.49)

 

 

3. <2세의 인연> 또한 불교 비판적인 논의를 견지한다. 선정(禪定)에 들어갔던 법사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칠칠치 못한 사내로 갱생하는 사건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선정이라는 지극히 선한 전생의 행위조차도 후세의 좋은 보답을 기약할 수 없다. 삿된 기대를 버리고 현세를 충실히 사는 것이 참되고 중요한 것이다.

 

어처구니없구나. 부처님께 빌어도 정토에 가는 것은 힘들구나싶다. 살아 있는 동안 힘써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몸에 붙인 가업이 아닐까.” (P.72)

 

 

4. 아키나리는 <해적>에서 관심을 사상에서 학문으로 돌린다. 이 작품은 헤이안 시대의 <도사 닛기>의 저자인 기노아손 쓰라유키를 작중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임기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르다가 마주친 해적이 쓰라유키를 비롯한 <고킨와카슈> 편찬자들을 학문적 관점에서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후반에는 대조적으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높이 평가하는 논평을 전개한다.

 

그대는 노래를 잘 읊지만, 고언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천황마저 욕되게 하였습니다.” (P.55)

 

노래는 그럴싸하게 읊어도, 칙찬집을 엮은 네 명 모두 찬가의 필법이 틀린 것은 학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P.57)

 

그대는 노래는 잘 읊지만, 한적을 많이 읽지 않아 얼핏 봐도 결점투성이다.” (P.64)

 

 

5. <외눈박이 신>도 마찬가지다. 와카의 도를 배우기 위하여 상경하던 관동 지방의 젊은이에게 신사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

 

글을 짓고 노래를 읊는 것은 제 스스로 마음으로 터득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르침대로 되겠는가. 물론 처음에는 스승을 모시는 일이 예도에 들어가는 입문 역할은 한다. 허나 깊이 들어가자면 제 스스로 만드는 길 외에 배울 방법이 있겠는가.” (P.79)

 

아마도 아키나리는 유명한 스승의 명성에만 의존하고 스스로 갈고 닦지 않는 시대의 풍조에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6. 이 점에서 <노래의 명성>은 작가의 노래, 즉 와카에 대한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만요슈>에 수록된 노래들은 오직 자신의 마음에만 충실하였지, 타인의 모방이나 비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역으로 말한다면 작가 당대에는 진실한 내면보다는 외형적 기교에 신경을 썼다는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옛 사람은 마음이 순수하여, 남의 노래를 훔친다는 의식이 없었고, 자기 마음의 느낌을 정직하게 진술했다......오직 마음에 감동한 것을 솔직하게 읊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래의 참된 길이다.” (P.132~133)

 

 

7. <죽은 목의 미소>는 당대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는데, 인색한 부잣집 아들과 가난하지만 바르게 자란 집의 딸 간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어디 세상에 한두 건이겠는가 마는 여기서 관심의 초점은 시종 인색하며 무자비한 부친 고소지도 아니며, 여동생의 목을 친 모토스케와 이를 알고도 의연한 모친도 아니다.

 

작품 모두에 작가는 고소지와 대조적으로 아들 고조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훌륭한 성격에 문무의 재주도 탁월하며 굳센 마음의 소유자로서 너그러우면서도 예의가 바르다고 하니 더 이상의 찬사가 없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고조가 애정 문제에 있어 이도저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취한다는데 있다.

 

여인네 집에 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를 설득하여 혼인을 치르겠다고 살살 달래다가도 막상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부친의 엄명에 일언반구 항변도 하지 못한다. 고조의 주저와 갈등은 외견상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리의 말마따나 고조의 마음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P.97)

 

언뜻 보면 고뇌하는 고조에게 아키나리가 동정을 품은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작가는 고조의 갈등과 고민을 담담한 어조로 뉘앙스만 풍기지 구체적이며 세부적으로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조의 의지박약을 내심 질타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세상의 여인네들이여, 고조 같은 남자에게 사랑을 바치지 말지어라,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도다.

 

 

8. 일본은 막부 시대 이래로 오랜 기간 무사도의 국가였다. 무사도는 명예를 중시하여 이것이 손상당할 경우 목숨을 걸고 복수하였으며, 세인들의 찬사도 뒤따랐다. 아키나리는 <스테이시마루>에서 맹목적인 복수의 타당성에 의문과 비판을 동시에 제기한다.

 

오해와 악의가 겹쳐 살인범의 신세로 쫓기는 거한이자 장사인 스테이시마루.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복수의 길에 나서는 죽은 부자의 아들 고덴지. 두 사람은 모두 그릇된 관행과 제도의 피해자들이다. 이들이 힘을 합쳐 바위산에 터널을 뚫은 일은 사자를 위한 공양을 넘어 잘못된 세상을 향한 태산 같은 웅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9. 마지막 두 편은 전통적 모노가타리의 형식에 가깝다. <미야기의 무덤>의 미야기는 몰락한 가문의 여인으로서 속임수에 빠져 유녀 신세로 전락한다. 게다가 정인(情人) 주타베와의 관계를 질시한 촌장의 간계로 정인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탄가는 그녀를 동정하는 아키나리의 헌가이리라.

 

이 작품에서 이채로운 대목은 미야기가 세상을 버리기 전 호넨 쇼닌이라는 고승에게서 염불을 전수받는 장면이다. 시종 불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작가가 유독 여기서는 후하게 서술하고 있다. 신분의 고하와 귀천에 관계없이 일체 중생에게 구제의 길을 만들어주려는 스님의 자비심에 공명하는 작가의 심중의 발로로 받아들이고 싶다.

 

10. <한카이(樊噲)>는 분량 면에서나 내용적 측면에서 이 작품집에서 제일 문제작이다. 일본 문학에서 이전에 이런 유형의 모노가타리가 없었다면 단연 일본문학 최초의 피카레스크 소설, 즉 악한소설에 해당한다. 거한이자 장사란 점에서 스테이시마루와 비슷하지만, 한카이는 도덕과 윤리의 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도박에 빠져 부친과 형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패륜적 죄를 저지르고 이후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도와 살인을 밥 먹듯이 자행한다. 그럼에도 한카이는 미워할 수 없는 사내이다. 재물에 활수하고, 제법 의협심이 있으며, 악기에도 재능이 뛰어나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욕망과 본능에 충실하다. 그는 번거롭다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난세라면 호걸이라는 명성을 얻어 나라를 빼앗고 적을 두렵게 했을 터인데. 참 용맹스러우신데......난세라면 영웅이 되었겠지. 허지만 치세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도적질한 죄과로 처벌을 받을 것이야.”(P.172)

 

한카이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전란의 시기는 사라졌다. 에도 막부의 통치아래 수백 년간 평화로운 시절이 이어졌다. 더 이상 세상은 한카이같은 호걸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골치덩이일뿐이다. 근세 일본은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자본주의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아키나리는 사라진 옛 시절의 유물을 흥겹게 반추하고 있다.

 

한카이가 정직한 법사를 따라 세속의 연을 끊고 대화상이 된 것은 시사적이다.

 

“‘마음을 간직하면 누구라도 불심이요, 놓치면 요마라는 것은 이 한카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P.180)

 

 

어찌하다 보니 잡설이 길어졌다. 본디 잘 모르고 이해가 안 되면 말이나 글이 주저리주저리 늘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만큼 <하루사메 모노가타리>에 수록된 개개의 단편들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표피상의 글귀만을 좇는 것은 용이하며 그렇게 받아들여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뭔지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들어앉아 심정을 답답하게 만드는 원인을 찾아서 하루빨리 속을 시원하게 뚫고 싶었다.

 

옮긴이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유하자면, 풍경화라기보다는 암호와도 같은 이정표에 가깝다.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표지 같다는 느낌을 준다......암호를 풀어 나타난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읽는 이가 제 발로 걸어가서 보아야 할 풍경일 것이다.”

 

어려운 작품의 쉽지 않은 도전이다. 조금만 더 보완했더라면 국내 초역이라는 명예와 더불어 갈채의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번역문과 편집이 매끄럽지 못하고, 손이 덜 간 자취가 역력하다. 작품해설과 주석에 옮긴이의 내공이 다소 딸린다는 인상을 준다. 석사논문을 다듬었다고 하는데, 옮긴이 자신의 독자적 연구보다는 나카무라 히로야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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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렬 2014-03-03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 책의 역자 조영렬입니다. 역자로서 위 평가에 100% 동의합니다. 번역하고 주석 달고 작품 해설 쓰면서 느낀 제 심리적 움직임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분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부족한 번역서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