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5
다야마 가타이 지음, 한영옥 옮김 / 소화 / 199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는 일본 근대문학에서 자연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 <이불><시골선생>을 읽어서 생소한 작가는 아니다. 이 작품은 이어지는 <아내><인연>과 함께 3부작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타이는 작품에서 서술 기법 상으로 평면묘사 이론을 추구한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는 작가의 주관을 더하지 않고 내부적 설명이나 해부의 과정에서도 조금도 더 보탬이 없는 있는 그대로 진행시키는 것”(P.294)이다. 이러한 평면묘사는 대상을 개인과 사회의 구분 없이 두루 적용할 수 있으며 실제 서구에서는 자연주의 문학이 사회와 제도의 부패와 모순을 폭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은밀하게 잠재되어 있는 내면적 고민과 갈등 등의 노출에 집중하고 있다. 다야마 가타이는 이러한 경향의 시초라고 하겠다.

 

삶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과 풍족한 삶, 부모 또는 형제 없이 사는 삶,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살과 불행으로 판단하는 삶 등. 여기에 때와 장소와 민족이라는 구분자까지 넣는다면 더더욱 복잡다단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본질적 양태는 대동소이하다는 데서 아이러니와 아울러 동질적 안도감조차 느끼게 된다.

 

삶은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져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질쳐 간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이 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종교와 예술과 미신 그리고 억제되지 않는 본능에의 갈구를 탐닉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노인이 천진한 아이와 싱싱한 청년을 볼 때 마주치는 모순된 감정은 그래서 오히려 자연적이다.

 

요시다 가문의 형제와 모친의 생과 사를 그린 이 작품의 소재는 지극히 평범하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자식을 키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가족을 위해 꿈을 버리고 하급관리로 살아가는 맏형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만해도 우리 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고부(姑婦) 간의 갈등은 상존하며, 며느리와 시누이의 갈등 또한 뿌리가 오래되었다.

 

가족은 인간이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도록 튼튼하게 키워내는 화분이며 온실이다. 성년이 된 개인은 보다 탁 트인 너른 공간에서 훌훌 거리낌 없이 살아가길 바란다. 여기서 자칫 개인과 가족의 관계는 퇴행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부모는 어린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자식을 어느덧 훌쩍 자라서 제 몫을 할 나이가 되면 뿌듯함과 대견함이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식이 부모의 노고를 알아주고 감사의 염을 항상 보여준다면 모르겠지만, 사랑은 원래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부모와 자식 간의 생각이 동등하기는 쉽지 않다. 부모는 부쩍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와 신세에 불현 듯 비탄을 느끼며, 자신과 배우자 그리고 새로운 가정에 관심을 더 기울이는 자식에 일말의 배신감마저 품게 된다.

 

건강히 장수하다가 평온한 임종을 맞는 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하던가. 연로해지면 온갖 질병에 시달리기 일쑤며, 대개 금방 낫지 않고 만성이 된다. 긴 병에 효자는 없다. 긴 투병은 본인은 물론 나머지 가족들마저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들게 한다. 그나마 있던 한 줄기 애정마저 어느덧 흐릿해지고 암암리에 빨리 저세상으로 가시길 바라는 상황이 되고 만다.

 

거기에는 더 이상 자식들을 위해 고생만 하신 어머니는 없었다.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로서 또한 스러져 가는 불유쾌한 하나의 괴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P.189)

 

언뜻 진부하고 상투적인 인생의 흐름이어서 오늘날 드라마에서는 다루기조차 않지만 이런 면면이야말로 기실 우리네 삶의 숨길 수 없는 진실한 모습이다. 작가가 주목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 백여 년 전의 일본 가정의 모습이 사소한 문화적, 시기적 차이를 감안하고 본다면 현재의 가정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노모와 맏아들 료의 갈등은 우선 편모가 흔히 갖는 상실감과 소외감에 연원한다. 노모로서는 맏아들이 늙고 혼자인 자신 앞에서 마누라와 희희덕거리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료는 가장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만의 한 가닥 영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한다. 이러한 갈등이 첫째 아내의 죽음, 둘째 아내와의 이별을 가져왔으며 갓 결혼한 셋째 아내와 노모와의 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다른 자식들인 센노스케와 히데오도 다소간 같은 심경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일견 서운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자식의 불효와는 다른 차원의 사안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이 꾸역꾸역 솟아올랐다.” (히데오, P.178)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인 것이다.” (센노스케, P.190)

 

새로운 세대가 대두되면 나이든 세대는 퇴장을 각오하고 준비해야 한다. 심정적으로는 다소 서운하더라도 불가피한 현상이다. 혹여 료의 노모처럼 중병에 걸려 서서히 스러져 간다면 간병하는 가족들도 지치게 마련이다. 불효라고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매도하기는 어려운 게 이 또한 삶의 자연적 측면인 탓이다. 결국 사람의 삶도 죽음도 홀로 가야하는 길이다. 절절하고 뼈저린 아픔이지만 홀로 감내해야 할 몫이다.

 

울어 주고, 슬퍼해 주고, 위로해 주어도 결국 이 몸은 혼자 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P.184)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되는구나 하는 덧없음에 비애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P.199)

 

이렇게 해서 사람은 태어나고 또한 죽으면서 세상은 흘러가는 것이다.” (P.209)

 

그러나 이것이 인간인 것이다. 이것이 자연인 것이다. 가는 자는 가게 하라. 사라지는 자는 사라지게 하라.” (P.269)

 

노모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격식에 따라 장례식이 거행되고 남은 자식들을 제외하고 조문객들은 모두 떠난다. 부모 잃은 자식들의 심정, 그것은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하지 않다. 진작 부모로부터 홀로선 존재가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한 가닥 끈마저 완전히 절연된 외톨이가 된 처지다. 상징적, 심리적 의지도 기대할 곳이 없어졌다. 그들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계와 생활이 펼쳐졌다.

 

그 누구나 모두 그 앞에 새로운 생활이 펼쳐지는 걸 보았다. 형제간의 관계에서도, 부모라는 연결 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된 자유와 허전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P.234)

 

이제부터는 정말 혼자다. 넓은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뜨거운 눈물이 가슴에 차올랐다.” (P.268)

 

이처럼 이 작품은 한 가족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의 양태와 관계를 치밀하게 모색하고 있다. 작가 자신의 가족사가 바탕이 된 민감하고 어두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작품 전체의 색조는 온화하고 담담하다. 여기에는 작가의 의식적 감정 부여를 회피한 의도적 노력이 주효하다. 이 점에서 뒤에 나온 <시골 선생>과 다소 차이가 있다. 가타이의 장기인 세밀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묘사는 전원에 국한하지 않고 요시다 가족 간의 심리를 각 개인의 처지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듯 기술한다.

 

생과 사는 인간의 영원한 테마다. 삶과 죽음은 인간과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 주위에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정경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새삼 발견하는 삶의 성격은 작품해설과도 같이 이러한 모습이다.

 

삶에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진실한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P.296)

 

인생이란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이다. 사람은 태어나고, 또 죽으면서 세상은 돌아가는 것이다.” (P.2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