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희진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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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땅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선이 가로질러 달린다. 그 선의 굽이굽이마다 깃들어 있는 이야기는 노래를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조상과 후세가 만나는 길, 부족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되새길 수 있는 길, 그것이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의 송라인이다.

 

<파타고니아>으로 일약 명성을 떨친 채트윈은 십년 만에 이번에는 남미가 아닌 호주를 선택한다. 그들의 노래의 길을 찾아서. 호주 중앙의 뜨겁게 달아오른 황야는 파타고니아와는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오지이자 변방이다. 자연의 위력이 인간 삶의 유형과 양태를 조건 짓는 곳. 정작 그곳에서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요인은 불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들이다.

 

노마드에 대한 채트윈의 관심은 오래전부터였다. 그의 최초로 시도했던 저작도 노마드에 관한 것이었음은 전작의 작품해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작의 성공 이후 저자의 삶의 편력을 추적해 보면 자신 또한 전형적인 노마드임을 깨닫게 된다. 채트윈은 결국 자신의 본질적 속성에 되돌아온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 노마드에 대한 상당한 분량의 단상들이 삽입되어 있고, 이것은 작가의 송라인에 대한 추적과 서로 교차하며 작품의 중요한 전개 구조를 형성한다. 송라인 자체가 노마드를 내포하고 있다.

 

“애버리지니의 믿음에서 노래 불리지 않는 땅은 죽은 땅이었다. 따라서 노래가 잊히면 땅 자체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었다.”(P.85)

 

“음악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길을 찾는 기억 은행이죠.” (P.167)

 

호주 원주민들은 노래를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정체성을 재발견한다. 노래의 길끼리 마주치는 곳에서는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진다. 영역의 관념을 함유하고 있으나 결코 영토의 개념은 아니다. 3차원적 면이 아니라 2차원적 선이므로 상호 중첩되지 않으며 이해관계의 충돌 여지가 없다. 그들은 소위 울타리를 두르는 땅따먹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삶의 기원은 길의 시작과 끝, 그리고 도중의 이야기에 있다.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길을 당대와 후대에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화를 자신의 시각에 따라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호주에 갓 도착한 유럽인들이 그러하다. 일단 자신을 우위에 놓으면 만사는 다 열등하게 보인다. 열등시 해버리면 공감과 이해가 생겨날 여지는 없게 마련이다.

 

“그들[애버리지니]과 백인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에 있었다. 백인은 자신들의 의심스러운 미래관에 맞춰 끊임없이 세상을 바꿔왔다. 애버리지니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데 정신적 에너지를 다 쏟았다. 그것이 대체 어떤 면에서 열등하단 말인가?” (P.190)

 

근년 들어 노마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주목이 급증하였다. 유목민적 삶의 가치가 부활한 것은 물론 산업적, 경제적 관점에서 비롯한다. 끊임없는 경쟁과 개발 노력이 기업과 시장의 성장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의 두 부족의 예(P.426)를 통해서 정주민과 이주민의 성향 차이를 알 수 있다. 정착 생활을 하는 아란다족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서 순수한 혈통을 내세운다. 반면 서부 사막 민족은 이동 생활을 하는데 매우 개방적이며 언제나 쾌활하게 웃는다.

 

채트윈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마드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존재임을 많은 인용과 단상과 일화를 통해 눈앞에 제시한다.

 

파스칼, 보들레르, 성 안토니오, 페트라르카, 랭보, 다윈, 칼레발라, 키르케고르, 아나톨 프랑스, 아이타레야 브라흐마나, 석가모니, 워즈워스 등등.

 

그리스 아토스 산에서 한 헝가리인은 채트윈에게 “인간은 정착하도록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P.306)고 말하였다. 인간의 정착과 도시화는 문명을 낳았지만 개인에게는 불행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븐할둔의 철학 체계는 인간은 도시를 향해 나아갈수록 도덕적·육체적으로 타락한다는 직관에 바탕을 둔다.” (P.305)

 

가만히 있지 못함에도 가만히 있어야만 할 때 품게 되는 불안감이야말로 문명화되고 정착된 삶을 누리는 현대인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우리 유전자에는 옛 선조들의 노마드 흔적이 각인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실제적 삶으로 극단적으로 체현되었을 때 지칭하는 용어가 소위 ‘역마살’이다. 채트윈이야말로 액운에 씐 팔자가 아니겠는가. 남미 파타고니아,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사하라 사막의 이쪽과 저쪽의 지역들, 인도와 동양 등. 역마살이 아니라도 우리에게는 정형화된 일상을 훌훌 털고 일어나고 싶은 욕구를 지닌다.

 

사십 대의 채트윈은 확실히 문체에서도 글의 호흡에서도 십년 전과는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쫓기는 듯한 치열함을 잃은 대신 보다 넉넉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때의 순역(順逆)을 기다릴 줄 안다. 전체적 흐름과 글쓰기의 방식은 전작과 유사하다. 기행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애매한 장르 구분. 대신 여기서는 홀로가 아니라 믿음직한 동행자 아카디와 일행들이 있다.

 

“송라인이 반드시 오스트레일리아에만 있는 현상은 아닌, 보편적인 것이라 느꼈다. 송라인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적 삶을 조직하는 수단이었다고 말이다. 그 이후 생겨난 다른 모든 체계는 본디 모델의 변종, 혹은 왜곡된 형태였다.” (P.438)

 

“내 눈에는 송라인이 모든 대륙과 모든 시대를 누비며 뻗어 있는 것이 보인다. 발 디디는 곳마다 인간은 노래의 발자취를 남겼“다. (P.438)

 

채트윈은 송라인의 보편성을 지적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존재와 영역을 표현하고자 한다.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강한 생명력이 노래라는 틀에 담겨 전해온다. 눈에 쉽사리 보이지 않기에 혹자에게는 자칫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오해가 가능하다. 다만 진정과 이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약하나마 노래의 길이 인적없는 황무지 한복판에서도 오롯이 떠오름을 볼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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