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이브 세계문학의 숲 30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양가적이다. 장밋빛 전망은 과학자, 기술자 및 이로 인해 직접적 이득을 얻는 자본가의 태도이며, 기계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와 농민 등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잿빛 시각이 우세하다.

 

릴아당의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전자에 가깝다. 미래의 여성, 즉 이브를 안드레이드라는 로봇을 만들어 대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과학기술의 압도적인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에게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인간을 닮고 인간을 흉내 내는 기계적 존재, 그것을 안드로이드라고 부르든 아니면 릴아당처럼 안드레이드로 명명하든 그 본질은 동일하다.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무한성에 도전하는. 그것은 과학기술의 완전성에 대한 굳건한 신념에 근거한다.

 

작가는 당대 독자들에게 안드레이드 로봇 제작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자 에디슨의 이름을 사용한다. 에디슨이 비밀리에 안드레이드 아달리를 창조(인간적 존재이므로 발명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하였다는 식으로. 게다가 작품 중반부의 상당 분량을 에디슨이 아달리를 제작한 방법에 대한 설명에 할애한다. 전기의 마법사 에디슨답게 각종 전기적 장치로 구현한 아달리에 대해 듣다보면 확실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동감이 들 정도다. 오늘날이라면 IT 외에 나노와 생명공학 등의 첨단 기술을 적용하여 만들었다는 셈이다.

 

미래의 이브가 의도한 인간의 미비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국 귀족 에왈드 경의 아름다운 애인 알리시아에 있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룬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남녀를 불문하고. 에왈드 경은 여성에게 외적인 미모와 함께 높은 수준의 정신적 능력을 기대한다.

 

“알리시아 양의 영혼과 육체 사이에 있는 것은 제 오성을 당황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불균형이 아니라 ‘부조화’였습니다.” (P.75)

 

기실 젊은 귀족이 절망하고 에디슨이 마지못해 동의하는 알리시아 양의 사고와 행동 양태는
당대, 아니 오늘날의 일반적인 현상과 큰 차이가 없다. 실리적이고 현세적이며 주위의 인정에 목말라하면서 지성과 도덕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인간유형이 아니던가.

 

“당신이 사랑하고 있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실재하며 살아 있는 존재는, 지나가는 인간의 형상 속이 아니라 당신의 ‘욕망’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P.155)

 

“당신은 바로 그 ‘그림자’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자’를 위해서 당신은 죽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절대적으로,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이 ‘그림자’뿐입니다!” (P.156)

 

현실의 인간은 수많은 결함과 약점을 지니게 마련이고, 여기에 실망을 금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충분히 인정한다. 에디슨은 에왈드 경을 비판하는 것은 현실의 여인이 아닌, 환상의 존재를 꿈꾸는 데 있다. 이상은 가슴 속에 품는 것이지 두 발로 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가 아니다. 릴아당은 당대 자본주의 사회 속의 부르주아의 변질된 인간성과 아울러 구 귀족계층의 비현실적이며 진부한 의식을 동시에 비판한다.

 

그렇다면 에디슨이 안드레이드 제작에 나선 동기는 무엇일까?

 

“한 인간의 혼을 변화시켜 구제해줄 수 있는 전기인간의 창조를 공식화 할 수 있다면, ‘과학’으로부터 ‘사랑’의 방정식을 끌어내 보도록 합시다. 이 방정식에서 사랑이란 제일 먼저, 인류에 느닷없이 더해진 전기인간 없이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된 저주들을 초래하지 않을’ 사랑이며, 사랑의 불길을 막을 사랑입니다.” (P.275)

 

“우리의 신들도 우리의 희망도, 이미 ‘과학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랑 역시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잊힌 전설, 과학에 의해 경멸당한 전설에 나오는 이브 대신에, 저는 과학적인 이브를 드리겠습니다.” (P.359)

 

가까운 친우의 뜻밖의 타락에 의한 파멸을 지켜보면서 에디슨은 육체적 결합관계를 배제하고 공허하고 변질된 영혼 대신 올바른 지적 능력이 갖추어진 인공적 존재를 생각하였다. 그것이 남녀 간의 무수한 비극적 연애사(戀愛死)를 방지해 주고 나아가 인류의 개인적, 사회적 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듯하다.

 

안드로이드 로봇과 관련된 영화들을 떠올린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서 영원한 생명은 인간을 기계인간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 영화 <에이 아이(AI)>에서 로봇은 인간을 닮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또 다른 영화 <아이, 로봇>에서는 독자적 사고와 감정능력을 지닌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다.

 

작가도 후반부에서 완성된 아달리에게서 설계되지 않은 미지의 지적 발달을 언급한다. 형이상학적인 신비가 개입하여 아달리의 기계적 색채를 서서히 지워나간다. 이처럼 로봇은 인간에 근접해지고자 하며 점차로 인간의 조역이 아닌 주역을 지향하고자 하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로봇 발달의 필연적 귀결인 인간과 같은 로봇, 그래서 사람들은 안드로이드에 열광하는 한편 깊은 우려를 품는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기본적 가치와 연결된 사안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릴아당은 과학진보에 찬동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의 다른 작품집 <잔혹한 이야기>에는 당대 자본주의 확산에 따른 인간 양태를 절묘하게 희화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래의 이브>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표피적 전개에 현혹되다 보면 릴아당의 본의를 오독할 우려를 유의하여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달리가 바다 속에 수장되는 마지막 대목을 통해 명확하게 구현된다. 이로써 작가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안드레이드 로봇은 본질적으로 신과 인류의 가치에 대한 위배라는 점, 따라서 가까운 시일 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과학의 순수성 내지 탈 가치성을 주장할 것인가?

 

※ <잔혹한 이야기> 번역본에서 <미래의 이브>가 근간 예정이라고 하였는데 수년이 흐른 뒤 출판사가 바뀐 채 드디어 나왔다. 저간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으나 우여곡절 끝에 번역본이 나오게 된 점이 반갑다. 유력한 세계문학전집의 일환으로 출간된 점은 다수 독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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