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기는 위안의 대화
성 토마스 모어 지음, 성찬성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솔직히 이 책을 읽는데 많이 망설였다. 토머스 모어의 몇 안 되는 저작을 접하고 싶은 욕망과 한편으로 비기독교도 입장에서 굳이 종교서적을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 사이에서.

 

고난(tribulation)은 종교의 유무와 상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고난에 마주쳤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정신적 자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린 중요한 사유이다.

 

이 책은 토머스 모어가 감옥에 갇혀있던 최후의 시기에 씌어졌다. 모어는 참수형에 처해지고 이 작품은 그의 사후에 유작으로 출간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수감된 모어가 온갖 회유와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목전에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볼 때의 심경이 여기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의 영혼의 자서전이다.

 

작중의 헝가리는 당대의 영국이며, 오스만 투르크의 임박한 공격과 이로 인한 기독교 신앙의 위기는 헨리 8세의 수장령 선언으로 국교회를 설립한 영국의 정치 상황과 이로 인한 가톨릭교도의 신앙 위기와 중첩됨을 조금이나마 모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알아차릴 수 있다.

 

외부의 적대적 위협에 감연히 맞서 투옥 내지 죽음을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버리거나 잠시 숨겨서 이생의 삶을 구걸할 것인가는 그래서 작중의 안토니오 뿐만 아니라 모어 자신에게도 절실한 질문에 해당한다.

 

사실 당대 영국의 무수한 종교인들과 귀족들 및 지성인들은 수장령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했다. 고위직 가운데 가톨릭을 포기하지 않아 처형을 당한 이가 모어와 피셔 대주교 등을 포함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역으로 말하면 모어가 가톨릭을 포기하였다고 해서 비난받을 처지가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모어는 자신의 (참다운) 신앙을 택하였다.

 

믿음을 택하는 것은 외적인 많은 상실을 가져온다. 육체적으로는 감금과 투옥, 고문 내지 죽음을 감수해야 하며, 물질적으로는 사회적 지위와 재산 등 외적 자산의 상실이 뒤따른다. 모어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외적 상실을 능가하는 더 큰 내적 위안을 설파한다.

 

위안의 최고 단계는 바로 독실한 신앙이다.

 

이 단계는 위안의 최고 목표를 하느님께 두고, 자신의 고난을 인내로이 감수함으로써 그 분의 총애를 얻고, 자신이 겪은 고통의 대가로 천국에서 그분이 내리시는 보상을 받는 것을 위안의 최고 대의로 여기고 수용하는 단계인 것이다.”(P.42)

 

우리의 첫 번째 결론은 영적 위안은 어떤 것이든 간에 반드시 신앙의 토대를 전제로 하고 있고, 신앙은 하느님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불어넣을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이를 끊임없이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P.47)

 

모어는 신앙인이지만 법관으로서 오래 봉직하였다. 그의 글에는 방법론적으로 상황과 문제의 원인을 세밀하게 정리하고 분석하는 성향이 엿보인다. 애매하고 모호한 여지를 남기지 않고 차근차근하면서 철저하게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여기에서도 그는 고난을 원인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우리의 명백한 잘못에 따른 고난과, 죄를 알지 못하거나 예방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 그리고 순전히 공로를 키워주기 위한 고난.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과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종교의 토대 자체가 상이하지만 후자는 거의 동일하며 다만 로마 교황의 종주권의 인정 여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로마 교황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성서에 대한 믿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현대의 무수한 개신교도 결국은 범 기독교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의문이다.

 

모어의 입장은 단호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도에게 정통이 있으며, 사도의 후계자가 바로 로마 교황이다. 종교상의 위기는 가톨릭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 개인과 성직자들이 타락에 기인한 것으로 공의를 받아들여 개혁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를 빌미로 교황권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매우 불순한 것으로 신앙을 위협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고난의 감수는 현세의 고통과 상실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를 능가하는 위안은 결국 종교적인 것, 즉 내세에서의 평온과 행복에 대한 기대감에 있다.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희망이 현세의 고난에 따르는 고통을 상쇄시킬 수 있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들은 위안을 지금 당장 육신을 즐겁게 하고 만족시켜주는 현재의 쾌락으로 이해하지 않고 아름다운 희망,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는 희망에서 비롯되는 평안함,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좋은 일 때문에 생기는 평안함으로 이해한다.” (P.140)

 

모어는 고난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흔연히 껴안는 고난과 흔연히 감내하는 고난, 그리고 도저히 모면할 수 없는 고난이 그것이다.(P.173) 그 중에서 두 번째가 분석의 핵심이다. 모어는 유혹과 박해의 관점에서 검토한다.

 

먼저 시편 91절을 인용하여 유혹을 네 가지 종류로 세분한다.

그분의 진실은 큰 방패와 갑옷이라네. 너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밤의 공포도 낮에 날아드는 화살도, 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도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도.” (P.205)

 

그는 네 가지 유혹을 성경 구절과 연관 지어 상세히 설명한다. 즉 밤의 공포는 소심증에서 비롯한 불안과 자살 유혹으로, 낮에 날아드는 화살은 교만으로, 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은 현세적 용무 내지 볼일에 대한 집착으로,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은 명백하고 노골적인 박해로 말이다.

 

3부는 박해에 대한 상술이다. 박해의 대상이 되는 외적 자산, 즉 땅, , 명성, 아첨, 지위 및 재화 등 현세의 물질과 구금과 죽음 등 육신에 미치는 고통에 대처하는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강조한다. 요컨대 굳건한 신앙의 힘으로 버티고 감내하며 순교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세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사후의 삶은 영구하므로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기쁨을 생각해 볼 때 찰나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이 장면에서 모어의 최후가 오버랩 되어 지나간다. 런던탑에 갇힌 모어, 헨리 8세의 돈독한 신임을 얻어 대법관의 지위에 올랐던 그는 왕의 기대와는 달리 수장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타인의 눈으로는 감금된 처지지만 그는 오히려 위안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 외적인 고난은 추호도 그의 믿음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그가 사형대에 오르면서 보인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 그것은 이미 천국의 빛나는 희망을 눈으로, 가슴으로 보았던데 연유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책장을 넘기기에 쉬운 책도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모어의 서술이 뜻하는 깊은 의미를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너무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 해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특히 시편 구절을 가지고 유혹과 박해를 풀이하는 대목) 그럼에도 모어의 굳건한 확신에는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더욱이 서술이 매우 평이하여 종교서에 흔히 보이는 난삽하고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대목이 일체 없다. 유머가 흘러넘치며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장애요소도 없는 역시 모어식 글쓰기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기독교인에게는 성경을 보완하는 좋은 신앙서의 구실을 할 것이다. 모어와 같이 바른 삶을 살다간 인문주의자 신앙인이 특히 고난을 극복하는 마음의 자세에 대해 이와 같이 5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는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모어 자신도 분명 크나큰 위안을 얻었을 것임은 당연하다.

 

기독교라는 틀과 시야를 벗어나 인간 고유의 내면성과 양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 모어는 자신의 신앙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믿고 생각하지만 타인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나의 믿음을 내면의 양심에 위배되도록 강제로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양심의 자유는 현세의 누구도 속박해서는 안 된다. 모어는 압제자에게, 세상에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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