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일곱 등불 마로니에북스 시각문화 총서 2
존 러스킨 지음, 현미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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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읽게 된 후 급작스레 저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러스킨의 삶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뚜렷이 구분된다. 후반생의 그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비평가라면, 전반생에서는 저명한 예술비평가였다. 특히 회화와 건축 부문에서 그 성과가 두드러졌다. 무슨 연유로 그는 관심의 영역을 예술에서 사회로 전환 아니, 확장하였는가? 그가 사회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계기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을 그의 전반기의 저작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가 이 책을 펼쳐든 까닭이다. 건축에는 무지하고 문외한인 주제에.

 

뒤돌아보건대 쉽지는 않은 책이다. 건축에 대한 기초지식을 지니고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 건축양식에 조예가 깊은 이라면 읽어나가는데 비교적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건축용어 자체부터 낯설고 그것이 건물에서 정확히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애매한 경우가 빈번하였다.

 

다행히 이 책은 건축의 기술적 측면을 다룬 기술서적이 아니다. 러스킨은 오히려 건축의 정신을 강조한다.

건축은 인간이 세운 구조체를 배열하고 장식하는 예술로서, 사용목적이 무엇인건 간에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P.21)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당대의 건축문화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에서 그는 건축이 지향해야 할 일곱 법칙(원칙, 원리, 정신 등)을 제시하고 이것이 건축의 앞길을 비추어야 진정한 건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희생의 등불

이것은 건설을 위해 값진 물건을 제공하는 정신”(P.23)이다. 건축가가 지닌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자원을 모두 투입해야 함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라는 것이다. 이는 최소비용의 투입으로 최대의 성과를 기대한다는 경제학적 논리와는 상반된 주장이기도 하다. 러스킨은 당대 건축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사라졌음을 언급한다.

우리 중 누구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 최근에 세워진 건물 중에서 건축가나 건설자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없다. 이것이 현대 건축의 특별한 성격이다. 옛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어린아이가, 야만인이, 시골뜨기가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P.35)

 

진실의 등불

건축은 진실해야 한다. 거짓되어서는 안 된다. 당연하지만 진부한 명제인데, 러스킨은 새삼 강조한다.

우리는 중상모략과 위선, 배신에 격분한다. 그것이 거짓이라서가 아니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인해 손실과 피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별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가장 큰 해악은 사실 달콤하게 속삭이는 번들거리는 거짓말이자, 친절하게 들리는 그릇된 견해들이다.”(P.46)

그는 거짓과 진실을 통상적 관념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이기에 건축에서의 속임수를 다음의 세 가지 부류로 제시한다.(P.51)

첫째, 거짓된 구조나 지지 방식을 제시하는 것

둘째, 표면을 칠해서 본래의 재료와 다른 재료를 재현하거나, 평면의 그림을 입체의 조각처럼 보이도록 거짓으로 재현하는 것

셋째, 어떤 종류이건 주형으로 뜨거나 기계로 생산한 장식을 사용하는 것

 

러스킨의 당대에 철재가 건축에 도입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에 대한 러스킨의 반응은 사뭇 부정적이다.

내 생각에 그 규칙이란 금속은 결물로는 쓰일 수 있을지언정 구조물로는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P.58)

금속이 한계 내에서 사용되어 건축의 존재와 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생각되더라도 너무 사치스럽고 빈번하게 쓰인다면 작품의 품위뿐 아니라 정직성 또한 손상시킬 것이다.”(P.59)

 

그의 견해를 현대 건축의 주류에 비추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러스킨이 건축의 경제적 효용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새삼 드러낸다.

 

진실의 관점에서 러스킨은 건축의 올바른 재료는 자연에서 얻어진 것으로 국한한다.

진정한 건축의 색은 자연석의 색이다.”(P.70)

 

힘의 등불

당대 건축에 대한 러스킨의 비판적 인식은 힘의 결여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당대 건축은 외관상 말쑥한 반면 소심하고 갑갑하고 빈곤하고 가련하다. 게다가 형식화된 기형, 움츠러든 정확성, 굶주린 정밀도, 옹졸한 인간혐오는 얼마나 해괴한 감각인지”(P.124)하며 절망적 탄식을 내뱉고 있다. 즉 예전 건축에 비해 당대 건축은 세련된 반면 본원적 힘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건축에서 힘의 의미는 다음의 문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배치와 지배로서 건축의 품위를 좌우하는 것은 그 정신적 힘의 표출이며, 또한 그 정도에 비례하여 숭고함도 높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건물은 인간이 수집한 뭔가를, 또는 인간이 지배한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의 비결은 그가 무엇을 모으고 어떻게 지배할지를 아는 데 있다. 이것이 건축의 위대한 두 지성의 등불이다. 하나는 지상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그에 합당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들에 대한 지배권이 인간에게 귀속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P.90~91)

 

러스킨은 힘을 부여하는 그림자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흔히 두드러지는 겉면에 시각이 분산되기 쉽지만, 건축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림자라는 간과되지만 의미심장한 언급을 한다.

긍정적인 그림자의 활용은 화가보다 건축가에게 더 필수적이고 숭고한 것이라는 점이다......이런 까닭에 크기와 무게 다음으로, 건축의 힘은 그림자의 양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이 그림자의 실제적인 역할, 즉 인간의 일상에서 그것의 용도와 영향력은 일종의 인간적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다.”(P.104~105)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비잔틴 건축의 종교적 고귀함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런 미학을 파악한 이가 거의 없음을 밝힌다.

 

아름다움의 등불

건축 또한 예술의 한 영역인 만큼 아름다움의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선 진실의 등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러스킨은 아름다움을 자연과 연관시켜 파악한다. 그에게 인공미(人工美)는 진실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매우 아름다운 형태와 생각은 모두 자연물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그것의 역 또한 기꺼이 가정하고 싶기에, 자연의 대상에서 오지 않은 형태는 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P.129)

 

기이하거나 이색적인 것은 신기할 수는 있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움은 평범함에 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빈도에 의해 아름다움을 추론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흔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흔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가정할 수 있다.”(P.131)

 

건축의 장식에서 중요한 부분인 조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독자적이다. 조각도 별개의 예술 영역으로서 미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이 건축과 구별될 정도로 튀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가장 완벽한 조각은 가장 순수한 건축의 일부이어야 한다.”(P.164)

 

생명의 등불

건축에서 생명을 찾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러스킨이 모르지 않음에도 그는 일말의 거리낌 없이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희생, 진실, 힘과 아름다움이 반영된 건축에 생명이 빠질 리 없다. 건축은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그대로 투영한다.

 

모든 사물은 생명이 충만할수록 고귀하다.

건축은 인간 정신 외의 다른 생명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분 좋은 소리의 음악이라든지 흠잡을 데 없는 색의 그림과 같이 본질적으로 자신 안에 즐거운 것들을 구성하지도 못하는, 즉 자력으로 행동할 수 없는 물체이다. 때문에 건축은 자신의 위엄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상당부분 그 생산에 관여하는 인간의 지성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P.197)

 

살아있는 건축의 확실하고 오해할 수 없는 징표가 나타나는데, 바로 지독한 성급함이다. 뭔가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한 몸부림, 그것은 하위의 것들을 모두 경시한다. 그래서 아주 만족스럽다고 인정되는 것이나, 많은 시간과 신경을 필요로 하지만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 모두를 가차 없이 경멸하는 풍조가 생긴다.”(P.205)

 

생명력을 잃은 조각은 차가운 조각이다.

올바른 완성이란 의도한 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고, 고도의 완성이란 좋은 의도를 생생한 인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재현은 정교한 처리보다 거친 처리에 의해 실현되는 경우가 더 많다.”(P.222)

 

흥미로운 점은 예술에서 차용과 모방에 대하여 비교적 너그러운 점이다. 순전한 창작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그가 보기에 더 나은 예술을 위해 필요하다면 차용과 모방을 할 수 있으며, 문제는 흥미를 끌지 못하는 차용과 무작위적인 모방”(P.201)에 있다고 한다.

 

기억의 등불

건축은 자체로 역사성을 지닌다. 잘 지어진 건축물은 수백 년도 거뜬히 견디어낸다. 오늘날은 내구연한이 짧을수록 오히려 각광받는다. 신축된 지 이십년만 경과해도 벌써 노후화라는 표현이 오르내린다. 재개발, 재건축이 환영받는다. 경제적 이해득실 때문에. 그 지역에, 건축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러스킨이 목도했다면 분명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공공건물과 주거건물이 진정한 완벽성을 획득하려면 기억하거나 기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면 건물들은 좀 더 견고하게 지어질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장식들이 은유적, 역사적 함의를 담아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오직 한 세대를 버티기 위한 집을 짓는 것은 그 사람의 악덕을 표시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바는, 정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다면 그들의 집은 신전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감히 훼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을 성스럽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P.232~233)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한 좋은 쓸모가 동시대인을 넘어 우리 인생여정의 계승자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이 지상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신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 동안 이 땅을 빌려주셨다. 이는 위대한 신탁상속이다. 우리 뒤에 올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권리를 가진다.”(P.239)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축의 진정한 빛과 색과 고귀함은 시간이라는 저 황금의 얼룩 안에 있다.”(P.240~241)

 

제아무리 잘 관리해도 건축물은 서서히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 여기서 복원에 대한 요구가 등장한다. 듣자하니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의 유적지에 인공적 수리와 복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월의 풍화 자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이라며! 반면 우리의 경우는 없는 건축물도 만들어낼 판이다. 진정한 문화적 고민의 결론이라기보다 상업적 고려의 흔적에 가까우리라.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에 대한 미약한 복원 논쟁을 기억한다면 여기에 대한 러스킨의 일침을 듣자.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하다.”(P.248~249)

 

복종의 등불

러스킨은 대뜸 자유를 부정하며, 오히려 복종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전체주의자였단 말인가? 오해의 소지를 살만한 발언을 그는 왜 하는 것일까?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대는 자유방임주의가 기세등등하게 세력을 떨치던 시기였다. 마음대로 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만사가 잘 처리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laissez-faire . 러스킨은 자유방임의 폐해를 예견하고 있다. 과도한 자유는 곧 무질서에 다름 아니다. 규율된 자유, 그것을 복종으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가장 적당하고 진실한 이름은 바로 복종이다. 복종은 실제로 자유를 토대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예속일 뿐이다. 자유가 주어질 때 복종은 더 완벽하다.”(P.256)

 

무질서라는 것은 질병에 상응하는 동의어다. 반면 명예와 아름다움의 증가는 개성보다는 오히려 절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P.257)

 

예술에서 개성은 중요한 미덕이지만, 지고의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무수한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일단 주목받기 위한 용이한 방편은 튀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성과는 다른 수준이다.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원형성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해 놀랄 만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의 위상이나 특이성을 위해 이러한 변화가 추구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튀기 위해 언어의 규칙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위반 없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피할 수 없고 계산되지 않은 빛나는 노력의 결과다.”(P.260)

 

러스킨의 조언은 오히려 우리 시대에 더 적합하다. 대중은 기이하고 이색적이며 신기한 것에 열광한다. 비록 찰나적이지만. 그것이 인기로 포장되고 상업적 가치는 높아진다. 대중예술은 물론 순수예술도 점차 경박단소에 물든 지 오래다.

 

 

내용에 대한 소회가 다소 장황해져 버렸다.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존 러스킨이 제시하고 주장하는 견해가 신선하면서 재기발랄하면서도 깊은 지혜를 품고 있다. 건축 비평을 빙자한 인간도덕론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책의 본령이라 할 러스킨 자신이 그린 유럽의 초기 고딕과 르네상스 건축과 건축 장식 도판 및 이에 대한 분석과 설명도 분명 흥미진진하다. 불행히도 내게는 이를 받아들이고 음미하며 감상할 식견이 부족하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물에 대한 언급은 언제나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대신 건축을 기본으로 하지만 사회 전반에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는 그의 일곱 등불은 남다른 관심이 끌린다. 불과 서른 살의 이립(而立)에 그는 후반생의 사상적 기초를 이미 확고히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러스킨의 발언 중 유독 내 마음을 뜨끔하게 하는 구절이 있다. 비단 나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밥벌이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은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하는 일은 다른 일이며, 그 또한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대강 하는 게 아니라 의지로 하는 일이다.”(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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