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아동교육론
에라스무스 지음, 김성훈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에라스무스는 교육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신과 광신에 빠지는 것을 혐오하였으며, 항상 인문주의 정신을 회복하고 지키는 데 주력하였다. 중세적 사고의 질곡에 갇혀 있는 동시대인들에 대해 계몽 정신의 선구자인 그로서는 깨우침의 자극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곧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는 <우신예찬> 이외에 후반부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아동교육론>을 각각 저술하였다. 이 중 후자가 비록 영어 번역본에 의한 중역이지만 국내에 출간되어 기본적 윤곽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무려 5백년 전의 인물임에도 그가 이 얄팍한 책에서 쏟아내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역설은 전혀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에라스무스는 기본적으로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어릴 적에 나쁜 물이 들기 전에 서둘러 소양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자식의 교육에는 매우 소홀히 함을 개탄한다. 말이나 개 등의 훈련에는 최고의 열성으로 우수한 전문가를 아낌없이 초빙함에도 오히려 자식을 방치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아들의 마음이 아직 악에 물들지 않고 산만함에서 자유로울 때, 가장 발달 가능하고 감수성이 예민할 때, 그리고 그의 정신이 모든 영향에 개방적이며 동시에 모든 것에 최고의 기억력을 발휘할 때 지체 없이 자유 교육과 첫 만남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P.21)

 

그는 인간은 올바른 교육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훌륭한 인물로 자라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동물이 본능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더구나 동물조차도 새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요령을 학습시키려고 노력하니 이성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본성과 도덕과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에 개탄한다.

 

이성의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성장의 과업을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성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행복의 시작으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체의 합이 훌륭한 양육과 교육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P.30)

 

아이가 태어나면 (귀족의 경우) 유모에게 맡겨진다. 따라서 유모야말로 아이의 첫 번째 교사인 셈이다. 좀 자라나면 가정교사를 들여 교육을 맡긴다. 유모와 가정교사의 자질과 능력은 아동교육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깊은 성찰 없이 또는 단순한 비용 고려만을 통해 자질이 속되고 형편없으며 미신에 물들고 사악하기 조차한 사람에게 아이를 내맡기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에라스무스는 비판한다.

 

가정교사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당신은 진실로 아르고스의 눈을 필요로 합니다. 전장에서 두 번의 실수는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P.72)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참된 본성은 이성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며,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무지(P.52)라고 말한다. 그는 본성은 방법에 의해 계발되어야 하고, 방법은 실천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야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방법은 곧 학습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게 교육의 중요성과 의의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학교다. 불행히도 저자에 따르면 당대의 학교는 그러하지 못하다. 남을 교육시킬 수 있으려면 교육자가 피교육자보다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함은 상식에 속한다. 교사가 지적으로 열악하고 정신이 저열하며, 품성이 야수적이라면 어떨까?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학교란 곳이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반교육적인 곳인지 여실히 고발한다. 습관적 가혹행위와 구타가 난무하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다.

 

그는 참다운 학교의 장면을 그린다. 온화함과 우아함이 지배하는 곳. 제아무리 지겨운 공부라도 능력 있고 뛰어난 교사의 솜씨로 재미있는 놀이처럼 아이에게 받아들여져 유용함이 즐거움과, 완전함이 쾌활함과 함께 추구(P.100)되는 곳, 그곳이 진정한 학교의 모습이다.

 

에라스무스의 교육론이 오늘날 교육학계에서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시대적 한계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아동교육에 대한 선구적 혜안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는 자신의 체험과 관찰과 진지한 사색의 결과일 것이다. 실상 그 자신이야말로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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