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7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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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프터는 개인적으로 무척 선호하는 작가다.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본은 다 찾아 읽었을 정도로. 이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늦여름>이 출간되었다. 거의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기쁨은 곱절 이상이다. 마치 진실로 애호하는 애장품은 섣불리 건드리지 않듯이 조심스레 때를 기다리다가 이제야 책을 펼친다.

슈티프터는 남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자적인 글쓰기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인물 간 갈등구조가 희박하며, 작품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극히 정선된 인물만이 등장하며, 항상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자연(산, 호수, 숲 등)을 배경으로 한다. 슈티프터에게 있어 자연은 단지 공간적 배경을 뛰어넘어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전개까지도 아우르는 중요한 요소다.

<늦여름>은 그의 말년의 대작 교양소설이다. 괴테의 그것과 비견된다는 후대의 평가를 얻을 정도다. 번역본 2권을 합하면 900면에 이를 정도이니 확실히 대작이다. 단지 분량만이 그러한 게 아니고, 책을 읽어가다 보면 슈티프터가 이 작품에 쏟은 정성과 열의를 확실히 감지할 수 있다. 이전까지의 중편 내지 경장편 정도에 해당하는 작품과는 선을 긋는 그로서도 정말 독특하기 그지없다. 이제 1권을 읽기 마친 시점에서 속단하기 어렵지만, 이 작품은 종전의 소설적 서사구조를 외면하고 있다.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을 더욱 극단으로 확대하여 종내는 소설 구조를 해체시키는 게 아닐까 우려될 정도다.

대개 교양소설이라 함은 어린 소년이 편력을 경험함으로써 인성과 지성을 수양하고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음이 통상적이다. 괴테로부터 시작하여 전에 읽었던 고트프리트 켈러의 <초록의 하인리히>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 하인리히도 역시 집을 떠나 여행을 하지만, 그는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편력은 선형구조 대신 계절에 맞추어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회귀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가 우연히 들르게 되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된 아스퍼호프도 마찬가지다. 이후 그는 집과 아스퍼호프를 오간다. 적어도 공간적 변화란 측면에서는 매우 제한되고 단순하기 그지없다. 이는 작가가 주인공의 편력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음을 뜻한다.


하인리히는 인생에서 2명의 멘토를 만난다. 아버지와 아스퍼호프의 주인어른 리자흐 남작이다. 남작을 통해 그는 아버지의 멘토성을 재발견한다. 작품에 기술된 내용만 보건대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멘토이자 전인적 인간형의 완성자이기도 하다. 과연 그들에게 인간적 단점과 약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과도한 완벽성으로 오히려 사실성이 저해될 정도다.


하인리히는 애초 자연과학적 지식욕으로 산과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편력을 하였다. 이후 그는 장미집에서 주인어른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관심영역을 서서히 넓혀나간다. 문학, 음악, 회화, 조각 등. 그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협소하였는데 보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작가는 스스로의 세계관 또는 예술관을 아래와 같이 드러낸다.


“위대한 작품이란 여러 부분적인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예술 작품은 모든 부분이 똑같이 아름다워야 하고, 그래서 어떤 부분도 홀로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 (P.404~405)


기실 작품에서 세밀하게 기술되고 정밀하게 묘사되는 자연과학적 지식과 회화 및 조각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 그리고 고대 예술에 대한 해박한 능력 등은 모두 작가 자신의 것이다.


슈티프터는 작심하고 이 작품을 쓴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순정한 문학의 표본으로 <늦여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보기에 당대 개인과 사회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발전된 산업의 영향은 당대를 변혁의 도가니에 휩쓸리게 하였지만, 그것이 항상 올바른 방향은 아니었다. 리자흐 남작은 이를 지적한다.


“선조들에 대한 무지 속에서 늘 우리의 진보만 떠들어대는 그런 습성에서 벗어나서 말이네. 물질에 대한 숭배는 경험의 빈곤을 떠올리게 하지.” (P.117)


이는 하인리히가 대리석상을 통해 깨닫게 된 인식에도 드러나 있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예술가들은 영혼으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주류의 형상화 원칙에 입각해서 작업했고, 때문에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에 없는 것을 작품의 불안과 격렬함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P.407)


슈티프터는 이 작품에서 미숙한 젊은이가 참된 스승을 만나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대하며 올바른 인간형으로 발전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교양소설적이다.


한편 소설의 다른 주인공은 장미집의 주인어른 리자흐 남작이다. 작품에서 그는 시종일관 하인리히에게 특별한 우정을 갖고 전지적 시점에서 그를 깨우치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대사는 매우 길면서 문명사적, 철학적 의미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게다가 그의 아스퍼호프는 자연에 대한, 그리고 자연과 공생하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그의 철저한 조화와 질서의 원칙은 장미집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 갈등과 난잡함이 없는 순결한 곳으로 승화시킨다.


하지만 분명 긍정적 공간이어야 마땅할 텐데 내게는 과도한 인위적 개입이 오히려 인공성을 극대화하고 있는 듯 여겨진다. 자연에 거슬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곳, 조금만 주의에 소홀해도 곧 무너질 사상누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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