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왕의 죽음 2
토마스 말로리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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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에서는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의 후반과 성배 탐색의 모험, 귀네비어 왕비와 랜슬롯 경의 사랑과 아서 왕의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트리스탄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말로리의 이야기에는 강조하는 차이점이 확연하다. 말로리는 기사로서 트리스트람 경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조드는 필생의 연인임은 맞지만 이는 다른 기사들도 모두 연인을 갖고 있고 이를 꿈꾼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반면 트리스탄은 그러하지 않다. 그는 뛰어난 기사이지만 이는 부수적이다.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은 연인 트리스탄이며, 이즈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 사랑이다. 따라서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빠졌던 원탁의 기사의 활약상을 말로리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맛볼 수 있다.

 

트리스트람 경 못지않게 판이한 성격으로 변모하는 게 바로 마크 왕이다.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마크 왕은 고매한 인품과 덕성을 지니며, 도덕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흔들리는 동정심을 품을 만한 인물로 나타난다. 반면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에서 마크 왕은 오로지 사악한 존재다. 그의 사악함은 비단 트리스트람 경에 대한 것을 넘어서 평소 불의한 언행과 비겁한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고결한 트리스트람 경에 대비되는 절대 악의 현현으로 몰락하고 있다.

 

말로리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적 등장인물 외에 못지않은 중요성과 비중을 두고 있는 기사 인물도 등장하여 독자의 심금을 매료시킨다. 라모락 경과 팔로미데스 경이 대표적이다. 팔로미데스 경은 이교도로서 트리스트람 경과 마찬가지로 이조드를 연모하므로 그와 끊임없이 갈등과 대결을 벌이는 상대역으로 나타나는데 이교도적 사악함과 기사도적 용기를 갖춘 모순된 유형의 인물이다. 라모락 경은 트리스트람 못지않게 비극적이다. 그는 랜슬롯 경, 트리스트람 경에 뒤지지 않는 탁월한 실력의 기사인데, 가웨인 경 형제들의 아버지를 싸워 죽이고 어머니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어 가웨인 경 형제들의 원한을 사고 있다. 말로리는 라모락 경의 최후를 간접적으로만 전하고 있는데, 이는 고매한 기사의 비극적 죽음 장면을 피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러한 태도는 마크 왕에 의해 암살된 트리스트람 경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귀네비어 왕비와 랜슬롯 경은 관점에 따라 여러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고 고매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의심할 여지없는 분명한 불륜인지 말이다. 순수한 정신적 사랑이었다면 침실에 불러들이고 같이 눕는 것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것을 당대의 일상적인 문화와 관습으로 볼 것인지 또 다른 의문이 뒤따른다.

 

확실한 것은 아서 왕과 랜슬롯 경에 대한 것보다 귀네비어 왕비에 대한 당대와 원탁의 기사들의 인식은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도어 경의 왕비 기소 사건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우리의 가장 고귀한 아서 왕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경만큼이나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오. 하지만 귀네비어 왕비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소. 그녀는 훌륭한 기사를 죽인 자이오.” (P.408)

랜슬롯 경의 왕비에 대한 언행과 왕비의 랜슬롯 경에 대한 언사를 비교하여 보더라도 확실히 귀네비어 왕비는 고매한 인간성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흠결이 엿보인다. 아서 왕의 부인인 왕비는 랜슬롯 경과 다른 여인의 연애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광적인 질투와 투기를 드러낸다. 랜슬롯 경을 내치면서 뱉어내는 잇따른 저주의 언사(“그에게 저주가 내리기를!”(P.430))를 보면 고결한 아서 왕의 배필로 적합한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러한 그녀의 부적절한 사랑이 결국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게 된 단초를 제공하였다.

 

성배 탐색의 이야기는 앞서 읽은 <성배의 탐색>과 싱크로 율이 완벽히 일치한다. 말로리는 프랑스 원전을 최대한 동일하게 요약하는데 주력하였다. 성배 탐색은 아서 왕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모험이다. 사라져 버린 성배를 발견하고 온전히 찾아올 수 있다면 그의 왕국은 불멸의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을 온전히 믿는 자는 거의 없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끼지 않는(P.300) 당대 사회는 죄로 넘친 세상이었으므로 성배가 존재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성배를 발견한 갤러해드 경과 퍼시발 경은 세속을 등지고 피안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작품 말미는 아서 왕과 랜슬롯 경 간의 슬픈 전쟁 이야기다. 여기서 가웨인 경 형제들이 주요한 역할을 맡는데, 이들은 훌륭한 가문이지만 진실하지 못한 심신으로 비난받으며, 모친 살해의 패역을 저지른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 그나마 가웨인 경이 사리분별이 탁월한데, 이마저 동생 가헤리스 경과 가레스 경의 뜻밖의 죽음에 맹렬한 분노에 휩싸여 버린다.

 

랜슬롯 경과 아서 왕의 분란은 잠재된 불안이 표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던 지도 모른다. 강력한 왕권 체제에서 왕보다 고결하고 용맹이 앞서며, 독자적 지지기반과 추종 세력을 가진 인물이 언제까지나 신하로 있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랜슬롯 경에 대한 가웨인 경의 미움은 상당 부분 왕실의 신권 견제에 기인한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가웨인 경은 섣불리 랜슬롯 경과 전면적 대결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래서 격노한 아서 왕을 달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가끔 저희는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일을 하지만 우연히 그것은 최악의 것이 됩니다.” (P.505)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가웨인 경은 배반자 모드레드 경(그는 아서 왕의 아들이었다!)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어 죽음에 임박하여 아서 왕에게 있어 랜슬롯 경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으나 운명은 사람들의 의지에 따르길 거부하였다. 랜슬롯 경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잇달은 배반자 모드레드 경과의 싸움에서 랜슬롯 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원탁의 기사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아서 왕의 강력하고 고결한 왕국도 종국을 맞이하였다. 아서 왕도 생사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채 아빌리온 계곡으로 배를 타고 떠나간다.

 

책장을 덮으면서 눈시울과 콧잔등이 시큰한 것은 위대하였던 이 전설상의 인물들에 대한 애석한 추모의 한줄기 상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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