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왕의 죽음 1
토마스 말로리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15세기에 씌어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에 관한 이야기의 집대성으로서 기사도 문학의 총 결산이라고 하겠다. 6세기 경 인물로 추정되는 아서 왕 전설은 12세기 들어 문학적 형상화의 세례를 받아서 당대 서구 대중들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유럽 지배민족인 게르만 족과 대결하여 쇠퇴하였던 켈트 족 영웅이 서구인들의 가장 인기 있는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일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서 왕 이야기는 최초에 영웅 아서 왕 개인의 무훈담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이야기는 확대되어 원탁의 기사가 생겨났고 호수의 기사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트리스트람[트리스탄] 경과 이조드[이즈,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그리고 성배 탐색으로까지 파생되었다. 오늘날 서양 예술과 오락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확대 재생산 현상을 통해 그네들의 문화에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의 의의를 유추할 수 있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기에 오백 면이 넘는 빽빽한 판형의 책 두 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웬만한 판형이라면 너끈히 서너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국내 최초 번역이자 완역을 위해 장시간 고생한 번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본문 내용 중에는 이미 읽어 아는 것도 있지만 처음 접하는 내용도 상당히 많다. 아는 것도 세부적으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작자 말로리는 대부분 프랑스어 원전에서 옮겨 수록하면서 가급적 원형을 유지하려고 애쓴 것처럼 보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의도적으로 편집을 가한 곳도 있다. 대체적으로 짜임새가 탄탄한 작품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단 작자 자신의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며, 지리적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퍼진 이야기를 모으고 시간적으로도 수백 년간 파생되고 변형된 이야기를 취합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작자 말로리는 방대한 이야기를 모아서 전하기에 힘쓸 뿐 일관된 체계로 재탄생하는 예술적 역량을 갖추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산만하여 개별 일화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며, 중첩되고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병치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이 책의 미덕은 단점을 능가한다. 개별적으로는 상세한 내용이 가능하겠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서 이 책보다 풍성하고 흥미로운 작품은 없을 것이다. 원전이 되는 작품들은 기사들의 사랑, 마법 등 관심에 따라 각각 초점을 달리한다. 작자 말로리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지상의 미덕은 기사도의 참모습을 전하는데 있다. 아서 왕도 랜슬롯 경도 사랑의 미약을 먹은 트리스트람 경도 무엇보다 올바른 기사로서 겪는 모험과 용맹, 기사도 정신의 발휘에 더 큰 비중을 든다. 그들의 불륜적 사랑과 심적 고뇌 등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몇몇 잘 알려진 원탁의 기사 외에 무수한 뛰어난 기사들의 일화를 많이 알게 된 점도 수확이다. 아서 왕이 왕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발린 경은 물론 별도의 장을 부여할 정도인 오크니의 가레스 경, 라모락 경과 팔로미데스 경 등.

 

중세 기사들은 모험과 사랑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기사로서 명예를 쌓기 위하여 대대적인 마상 창시합에 참가하였으며, 노상에서 마주치는 기사들끼리도 자웅을 겨루곤 하였다. 기사들에게 창시합은 의무이자 일과인 동시에 취미라고 해석된다. 비록 시합 도중에 불운하거나 불행에 빠지게 되더라도 당당한 기사라면 이를 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수많은 일대일 또는 일대다의 대결 장면이 등장한다. 시합이 너무 자주 발생하고 할애되는 분량도 많기에 이 부분만 없앤다면 전체 작품의 분량을 절반 가까이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자체가 중세 기사도 문화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할 때 역시 힘들더라도 봐두는 게 좋을 것이다.

 

기사의 계율에는 여성 존대가 있다. 진정한 기사는 아름다운 귀족 여인을 연인으로 두어야 한다. 연인은 혼인하여 부부가 될 수도 있지만, 기혼녀와 연인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가 그러하면, 트리스트람 경과 이조드 왕비의 정사(情死)가 대표적 경우이다. 뛰어난 여성에 대한 정신적 숭배 정도라면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할 것이지만 애정과 육체관계가 개입되면 사랑은 불륜으로 변질된다. 여기에 지위 및 도덕적 의무와 마음에 내재한 진실한 감정 간 갈등이 비롯된다. 이 작품에서는 그 경계가 분명치 않아 종교적,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초기에는 아서 왕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소년 영웅이 명검 엑스칼리버를 뽑아들고 좌충우돌하며 강자로 군림하게 되는 드라마틱한 여정. 아서 왕과 함께 그들의 친인척 간인 기사들도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케이 경과 가웨인 경이다. 특히 가웨인 경은 초기 아서 왕 문학에서 기사도 정신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이였다. 아서 왕과 이들 기사는 후대가 되면서 변두리로 밀려 나고 랜슬롯 경과 트리스트람 경이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아서 왕은 이따금 창을 잡고 말에 올라타지만 대개는 궁정에서 잔치를 벌이는 고귀한 왕으로 역동성을 상실하였다. 가웨인 경은 이류 기사로 전락하였다. 계율과 의무에서 불충할뿐더러 용맹에 있어서도 뭇 기사 중의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여기에는 여러 연유가 있겠지만 기사들 간의 전투에 식상한 대중들이 목숨을 건 위험한 사랑 이야기에 더 빠져든 것도 있다고 본다.

 

어쨌든 작자 말로리의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라이오네스의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의 한 중반에서 제1권이 끝난다. 제2권에서는 트리스트람 경의 남은 이야기와 성배 탐색,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그리고 아서 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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