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피어스의 꿈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465
윌리엄 랭글런드 지음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만지 고전선집은 다른 출판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국내 초역본에 큰 미덕을 갖는다. 지만지가 아니었다면 비록 발췌일망정 이 작품의 번역본을 읽어볼 기회는 언감생심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낯선 작품이니만치 인용구로써 소개하는 게 나을 듯하다.

“윌리엄 랭글런드의 <농부 피어스의 꿈>은 중세 영문학의 걸작으로 동시대 작가인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버금가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14세기 영국 평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고, 종교적·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품해설에서)

“<캔터베리 이야기>를 제외하고 중고 영어로 씌어진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은 14세기 후반에 창작된 <농부 피어즈의 환상>이다. 작자는 하급의 성직자 랭랜드라고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내용은 중세 문학 특유의 우의적인 꿈 이야기로서 참된 믿음의 길을 설명한 두운의 장시이다.” (<세계문학사작은사전>(김희보편저/가람기획))

 

발췌 번역의 한계(7247줄을 1000줄로 줄였다고 한다!) 상, 원작의 다채로움과 깊은 함의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작품의 기본적 특징과 의미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표현상의 수법을 대강이나마 조망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종교적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명명은 작가가 염두에 둔 것이 무엇인지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우선 주인공은 윌(Will)이다. 그밖에 진리, 성교회, 양심, 인내, 참회, 평화, 자비, 이성, 은총, 믿음, 자연 등은 물론 허위, 거짓, 아첨, 기만, 탐욕, 분노, 불안, 불친절, 질투 등 인간과 사회 내 존재하는 인성의 모든 속성을 전부 의인화시키고 있다.

 

작품의 전개는 윌이 꾸는 꿈의 형태로 전개된다. 양의 동과 서를 막론하고 현실을 비판하거나 초월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꿈의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여기에도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윌은 꿈속에서 작중 의인화된 인물들이 참된 진리를 구하고 올바른 교인의 삶을 찾기 위하여 방황하고 순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윌이 꿈속에서 마주치고 겪는 인물들은 왕후장상이나 고귀한 기사 등의 상위계층이 아니다. 이 점이 당대의 일반적 작품과의 차이점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농부 피어스가 있다. 그의 존재는 이채롭다. 그는 순례자이면서 방화하는 무리들을 이끄는 진리의 사도이기도 하다. 정의와 진리가 흔들릴 때마다 인물들은 농부 피어스를 언급하며 그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그는 베드로인 그리스도(P.97)이며, 십자가의 그리스도이며 기독교의 정복자(P.120)이다. 작중에서 농부 피어스는 기독교 이념의 완벽한 구현 모델로 그려진다.

 

꿈은 이중적 의미다. 윌은 실제로 꿈을 꾼다. 농부 피어스는 진리의 세상을 꿈꾼다. 윌이 농부 피어스처럼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삶의 태도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두웰(Dowell), 두베터(Dobetter), 두베스트(Dobest)가 그것인데, 이는 배우고, 가르치고, 적을 사랑하는 자세를 지칭한다.

 

피어스가 농부로 불리는 연유는 일곱 번째 꿈에서 나온다. 은총은 피어스에게 인간의 영혼에 뿌릴 씨앗을 나눠주고 경작하도록 하며, 네 마리의 황소(누가, 마가, 마태, 요한)와 수소(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스, 그레고리우스, 히에로니무스)를 주고 두 개의 써레(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준다. 은총이 나눠준 씨앗은 기본 덕목으로서 각각 신중함의 정신, 중용의 정신, 강인함의 정신, 정의의 정신이다. 피어스는 곡식을 저장할 집, 통합 또는 성교회를 짓는다.

 

마지막에 통합 또는 성교회는 적그리스도와 나쁜 속성들에게 무너지고 만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데,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불완전성과, 올바른 속성들 간의 긴밀한 협심과 겸손이 지속되지 못할 경우 진정한 통합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적그리스도의 기수가 자만심이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작가는 참다운 종교의 덕목과 자세를 제시하고 찾으라고 권고하는 한편, 당세의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계급에 비판적이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만 세속적으로 향유하려고 애쓸 뿐 예수의 올바른 가르침을 행하고 가르치는데 소홀하다.

 

한편 이 작품은 세속적인 의의도 갖는 것으로 평가받는데, 사실 발췌 번역본으로는 명확히 인식하기 어렵다. 단절과 생략이 과도한 탓에 전체적 작품 구도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어려울 지경이다. 하루바삐 완역본이 나와야 작품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전망이 가능할 것이다.

 

* 이 책은 원작의 첫 번째 꿈에서 프롤로그와 1, 2장, 두 번째 꿈에서 5장, 네 번째 꿈에서 13, 14장, 다섯 번째 꿈에서 15장, 여섯 번째 꿈의 18장, 일곱 번째 꿈의 19장, 여덟 번째 꿈의 20장을 번역하였다고 옮긴이는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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