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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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뿌리뽑힌 사람들! 이것이 소설집을 읽어나가면서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 갖는 상념들이다.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 어디에서도 파란 하늘과 환한 햇빛을 찾아볼 수 없다. 개기일식에 들어간 한낮의 풍경도, 태양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극지방의 백야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신진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서는 매우 기이하며 파격적인 제재들이다. 노숙자인 어린 미혼모, 대리모를 하는 여대생, 부모에게 버림받고 아버지같은 사람과 동거하면서도 밤마다 갓길을 방황하며 트럭운전사들에게 몸을 맡기는 여성, 죽은 남편의 형에게 스스럼없이 몸을 대주는 여인, 암에 걸려 불임이 돼버리고 엄마마저 암으로 병사하는 주부, 우유배달 손에 집착하는 인터넷 폐인, 외로운 남성의 스스럼없는 친구인 삼류극단 여배우 등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을 꿰뚫는 단어가 한마디로 ‘불쌍함’이다. 그네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내면 상태도 지칭한다. 그네들을 보면서 새삼 삶의 무자비함과 질긴 목숨 줄이 떠오른다. 그들을 백안시하고 때로 비윤리성을 손가락질하며 외면하기는 쉬운 일이다. 누구 말대로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하지만 똥을 피한다고 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똥을 잊어버리려고 해도 눈앞에 똥은 엄연하다. 이는 이 작품들의 인물들에도 해당한다. 작가는 무슨 의도로 썩 달갑지 않은 제재에 이리 집중하였던가? 단순한 취향이나 선정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작가가 작품을 다루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열세 살>의 십대 초반의 소녀에게 세상은 지하철역 대합실이다. 엄마와 노숙자 신세로 살아가는 소녀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을 몸으로 부대끼며 터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미혼모가 되기도 하며, 엄마의 비밀도 알게 된다.
소녀에게 세상은 어떤 존재일까? 불쌍한 사람들을 속여먹는 흰얼굴같은 위선자가 넘쳐나는 곳. 출산 후 배웅을 해주면서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 곳. 소녀의 눈에는 엄마의 바구니에 동전을 넣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도 아가를 낳으러 가는 것으로 비친다. 소녀가 할 수 있는 것 질끈 눈을 감는 것뿐.

 

<엄마들>에서 화자는 가난으로 휴학을 한 여대생이다. 젊은 여성이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제한적이다. 외모가 뛰어나다면 술집에 나가서 소위 텐프로가 될 수 있겠지만. 화자는 그래서 대리모를 택하였다. 화자의 어조는 건조하다. 흔히들 출산의 설렘과 기쁨은 남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성 고유의 특권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대리모인 화자에게 임신과 출산은 사업의 영역일 뿐이다. 어서 빨리 시간이 경과하여 번거롭고 불편한 몸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엄마처럼 버림받지 않기 위해 생계수단으로서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대리모를 구한 여자, 생계수단으로 대리모를 자청한 화자. 세상은 언제나 부조리하다.

 

<순애보>는 조금 복잡하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자신을 태워준 꿩장사를 아빠로 부르고 살아가며 아빠의 아이를 낳는다. 꿩농장을 하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그녀는 밤마다 고속도로 갓길로 나아간다. 트럭운전사들에게 몸을 맡기며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항구로 데려다 달라는 것. 나이든 아빠는 화자가 농장 일꾼인 치우와 같이 떠나길 바란다. 하지만 화자는 말더듬이 치우를 모욕적으로 거부하고 격분한 치우는 화자의 아기의 혀를 잘라버린다.
아빠도 치우도 악한 인물은 아니다. 화자는 과거에 붙잡혀 있다. 아빠가 가출하고 엄마가 새아빠가 될 남자와 함께 항구 근처로 가는 길에 자신을 버린 아픈 과거. 그 트라우마는 자신은 물론 주변에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다.

 

<환상통>은 기혼 여성의 몸에 들이닥치는 양대 위험 요인을 다루고 있다. 암으로 대변되는 병마와, 출산의 부재 즉, 불임이다. 임신이 되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받은 암 진단, 그리고 투병, 가족 관계의 파괴. 간신히 몸을 추스른 그녀에게 병마는 방향을 바꿔 친정 엄마를 덮친다. 노인에게 항암 치료는 암 자체보다 가혹하고, 노인은 쇠락한 몸으로 죽음을 맞는다. 자궁을 들어내 불임이 된 그녀는 어느 날 스스로 헤어진 남편이 병원에서 배가 소복해진 여자와 나오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녀는 아주 잠깐, 아랫배가 아리다.
독자는 남편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작중에서 그는 아내에게 한결같이 헌신하였으며, 이별도 마지못해 이루어졌다. 작가는 암 보다도 불임의 결과를 중시한다. 병마는 목숨을 빼앗지만, 불임은 관계를 깨뜨린다. 암을 이겨냈지만 화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친정 엄마는 세상을 떠났으며, 남편은 가정을 떠났다. 불임은 불행의 원인이자 결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랫배가 아픈 환상통을 겪는다.

 

<오늘처럼 고요히>는 수록작품 중 가장 처절하고 추잡하며 퇴폐적이며 비극적이지만 반면 실낱같은 희망이 숨어있다. 억척스러운 닭집 딸이 노래방에 나가며 웃음과 몸을 팔게 되기까지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이 내몰린 것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이를 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남편이 아는데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하였고, 대가는 남편과 아이, 집의 소실이었다.
화자의 말마따나 사는 건 사실 별게 아니다. 남편의 형인 병운과 함께 산다는 건 적어도 노래방이나 여관에 들락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즉 목숨의 안정적 연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상은 무미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세끼 밥을 먹고, 방해 없는 잠을 자면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하루가 반복되었다.” (P.140)
화자가 병운을 죽인 것은 혜경이에 대한 질투와 남자에 대한 배신감에서는 아니다. 병운이 화자와 혜경이 사이를 거리낌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묵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세상에 대한 불감을 일깨운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와 혜경 엄마에 대한 죄책감의 결부일지 모른다. 어린 혜경이의 낙태가 각성시킨.

 

<막>에서의 가족 관계 역시 파탄난 상태다. 엄마는 일찌감치 가출하였고, 오빠는 건달에 개망나니가 되었으며, 떠돌이 아버지는 할머니를 죽였다. 화자인 나는 지방극단의 나이든 삼류배우로 전전하고 있다. 엄마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던 오빠는 결국 엄마가 던진 펄펄 끓는 국물에 전신 화상을 입는다. 직업은 배우지만 화자의 경제적 수입은 대화를 나눌 친구를 필요로 하는 남자들의 도우미 역할에 의존한다.
“사는 게 무대 위에서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내가 선택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월을 견뎌도 되는 것인지,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P.215)
삶은 여전히 퍽퍽하다. 그래서 화자는 친구가 찾을 때, 불러줄 때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되뇌인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루>에서 민서 엄마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주부다. 외견상 별 문제없이 살아가는 듯싶다.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남편 몰래 만든 마이너스 통장, 치매가 의심스러운 엄마, 분홍색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이, 인물값 하는 남편. 그걸 다 꺼내 보일 수는 없었다.” (P.240~241)
조금은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은 그녀는 못 배우고, 못살고, 못생긴 지환 엄마가 맘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친한 척하는 게 싫다. 같이 요가원에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섞지만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지환 엄마가 자살한 후 이웃 사람들이 보인 반응에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과 지환 엄마를 감히 한데 엮으려고 하다니! 그래서 그녀에게 지환 엄마의 죽음은 별일 아닌 것이다. 일상을 깨뜨리려는 어떠한 존재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러기에 민서 엄마의 일상은 더욱 불안하다.
“어둑한 집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남편이 낮게 코 고는 소리,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집 안의 따스한 공기가 더없이 안락했다. 하루가 끝났다.” (P.255)

 

수록작 중 가장 인상깊은 작품은 <손>이다. 배경과 제재가 보다 현실적이므로 감정이입이 용이하며,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인터넷 폐인의 생활이 소개되어 있어 친근감마저 든다. 유일하게 남성이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어 이채롭지만, 제재를 생각하면 당연할 법하다. 낯익지 않은 제재를 몰입도 높은 구성을 통해 박진감 넘치게 결말로 이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가 노련미마저 풍긴다.
화자에게 물리적 낮과 밤은 의미가 없다. 동영상 관람, 온라인 게임, 채팅 등 흥미를 끄는 요인이 일단락되어 잠에 빠져들면 그때가 곧 밤이 된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일상은 단순해지며, 육체적 활동은 최소화된다. 이런 화자의 삶의 틀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우유배달 소리였으며, 이어 창백한 손이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가 손에 집착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만큼 손의 존재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그는 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유하려고 시도한다. 폐인다운 방식으로. 또한 변태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페티쉬라고 하겠다. 방식은 불순하지만 의도는 진지하였다. 그는 손을 구원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손을 통해 환상이 실현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지막에 그가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손을 기다린 것은 손에 대한 정면응시였다. 하지만 그는 거부당하였다. 손에, 세상에.
“손과 대면하지 못한 것도 상관없다. 내가 억울한 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P.188)

 

해설에서 그러했듯이, 작가는 작중 인물을 통해 인생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삶의 밝고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면서 잊고 지내던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든다. 너무나 익숙하여 공기와도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삶의 평온과 행복,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에 근거하는가. 조그마한 사건으로도 그것은 흔들리기를 되풀이하다가 양의 피드백을 일으켜 현상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작중 인물은 생존에, 생활에 급급하다. 운명에 치여 허덕이는 그들에게 지상과제는 오직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죽지못해 사는 삶도 살만한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아프고 병든 삶도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라리 생물로서의 본능에 가까운 생의 의지다. 여기에 도덕과 윤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불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뿌리뽑힌 사람들! 이것은 오만한 상념이다. 작중인물들의 운명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운수는 변화무쌍하다. 오늘의 행운이 내일은 불운으로 변전하기 일쑤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그들처럼 된다면 타인이 나에 대해 동일한 상념을 토로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공평하다고 생각하자. 앞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행이든 불행이든, 그건 개인의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정말 공평한 것일까.” (P.44)

개기일식이 끝나면 태양은 평소보다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빛이 강할수록 음영은 더욱 짙은 법. 작가는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혼자 추론해 본다.

 

* 간단하게 몇 자 끄적여 본다는 게 그만 생각보다 장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개별 작품들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성 싶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손에 든 책이 매우 쇼킹하다. 아무래도 작가에 대한 보다 바른 이해는 후속작을 읽어야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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