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끝으로의 여행 동문선 현대신서 175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이형식 옮김 / 동문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보름 가까이 걸린 대장정이다. 빽빽한 조판의 770여면에 달하는 분량에, 지하철 통근 독서족의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의 조우가 빚은 결과이다. 그래도 도중에 용기를 잃지 않은 점에 스스로 대견스럽다.

셀린느(셀린 혹은 쎌린느)의 1932년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프랑스 문학사적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피카레스크 소설>(이가형/민음사)에서 20세기의 피카레스크 소설로 분석을 하고 있어 흥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피카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이래 나의 관심은 작품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이 소설은 단순한 피카레스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지향하고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1. 작품은 주인공 나, 즉 페르디낭 바르다뮈의 인생 역정을 따라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의학도인 페르디낭은 친구와의 대화 도중 행진하는 군대를 바라보다가 불현 듯 자원입대한다. 정신발작을 일으킨 페르디낭은 군대를 나와서 아프리카 식민지행 배를 탄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극심한 기후와 더위로 기력을 상실한 그는 미국행 화물선에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희망의 도시 뉴욕에서 그는 밑바닥 생활을 하며 실망하고 다시 프랑스로 탈출한다. 이후 그의 삶은 프랑스 내 파리 인근과 툴루즈를 오가며 전개된다.

언뜻 보아서 피카레스크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주인공의 방랑과 성장, 사회악과 부조리에 의한 피해 등. 다만 페르디낭은 조금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서 피카로의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페르디낭과 레옹 로뱅송은 사물과 그림자의 관계다. 그들은 형제인 동시에 철천지원수다. 그들은 동전의 앞뒤이자 빛과 그늘이기도 하다. 페르디낭은 로뱅송 없이 완전하게 홀로 서지 못한다. 그들의 떠나있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각하는 기간이다. 그래서 페르디낭은 로뱅송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며 결국 그를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페르디낭은 용기없는 위악적 인물이다. 그는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호색한이다. 그는 남들처럼 당당하게 비속함을 구하지 못하며 언제나 전전긍긍한다. 다소 가볍고 입이 가벼운. 로뱅송은 용기없다는 점에서 페르디낭과 비슷하지만 그는 위악적이지 못하다. 그 역시 사랑에 관심 없지만 마찬가지로 여자에도 무관심하다. 그는 재차의 시도 끝에 앙루이유 노파를 살해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악인이다. 하지만 독자는 그를 악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악인이되 악인이지 않은 로뱅송과, 악인이 아니지만 악인스러운 페르디낭.

2. 그들의 공통점은 부조리한 삶과 세상을 떠나려고 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처음 마주친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장. 그들은 독일군에 항복하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죽음이 아닌 삶, 그것이다. 그들은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다.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전쟁, 서로 죽고 죽이는 이곳에서 그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전쟁은 삶과 죽음이 무수히 오가는 곳이다. 미사여구는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욕망과 진실만이 드러나는 공간.

파리에서 잠시 마주친 그들이 재회하는 곳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그들은 전쟁과 문명세계를 도피한다. 미지의 그 곳, 오로지 자연만이 인간을 압도하는 아프리카에서 육신과 정신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곳 역시 식민지의 부조리와 자연의 야만성이 그들을 집어삼킨다. 인사불성인 상태로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사제에 속아서 선원으로 팔려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어쨌든 페르디낭은 신대륙 미국에 도착하였다. 운 좋게 도시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페르디낭, 그에게 뉴욕의 거대한 도시문명은 비정한 물질성과 비인간성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규격화되고 획일적으로 동질화되는 곳. 그는 미국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귀국을 꿈꾼다. 여기서도 로뱅송은 항상 페르디낭에 한발 앞서 와있다. 그는 페르디낭을 예감케 한다.

전후 프랑스,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그가 염원하던 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는 의학수업을 재개하여 마친 후 변두리 지역에 개업한다. 여기부터가 작가가 진정으로 의도한 내용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나고 자란 그곳도 이제는 변질되었다. 페르디낭이 가렌느-랑시에서 겪는 옹색한 생활과 동네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그것은 소박하고 정겨운 그것이 아니라 삶의 불결하며 지긋지긋하게 악착같은 독기서린 것이다. 그 독기에서 앙루이유 부부의 노파 살해 기도가 움트게 되었다.

3. 페르디낭과 로뱅송의 여성 편력을 비교해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페르디낭은 앞서 말했듯이 호색한이다. 그는 끊임없이 여성의 육체를 애호하며 갈구한다. 부상으로 입원하였을 때 간호사인 미국여성 롤라, 수용소에서 알게 된 뮈진느와의 만남, 그리고 미국에서 매춘부인 몰리와의 감상적 연애, 극장 여배우 타냐, 그리고 로뱅송의 연인 마들랭, 병원 간호사인 소피 등. 그는 뭇 여성을 항상 갈구한다. 여성의 육체가 그를 안정시키고 거기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와 여성의 관계는 글자 그대로 표피적이다. 그에게 유일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몰리를 제외하고는.

반면 로뱅송은 여성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가 유일하게 만난 여성은 마들랭이다. 이마저도 그가 부상을 당하였을 때에 벌어졌으며 둘의 관계도 마들랭의 적극성과 끈질김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마들랭의 성격 부여가 궁금하다. 그녀는 외모와 나이를 고려할 때 로뱅송에게 연연할 연유가 결코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집착하며 마침내 그를 협박하다가 총으로 쏘아죽이고 만다. 로뱅송의 무엇이 그녀를 그에 집착시켰을까? 그의 불안정한 정서, 현실안주 거부적인 방랑자의 심리, 아니면 자신의 사랑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남자에 대한 오기의 발현 등.

이처럼 이 소설은 피카레스크 소설적 면모 외에, 반전문학의 성격과 아울러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문명비판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두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 밑바닥과 소시민의 견고한 궁핍과 간난을 여실히 도려내고 있는 점에서 사회비판의 색채도 아울러 띠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사상은 작품 표제에서 보여주는 그대로가 아닐까? 밤은 인간의 삶을 가리킨다. 어두운 밤에서처럼 인간은 자신의 삶을 방향도 알지 못하는 채 더듬거리며 나아가야 한다. 밤이 끝나면 인간의 삶도 종말을 맞는다. 삶이 어떠한 종말을 맺든 모르는 채 인간의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생의 목적이므로, 밤 끝으로의 여행! 도대체 밤 끝으로 도착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보면 로뱅송은 페르디낭 보다는 훨씬 순수한 사상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꽤 그럴듯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대에 화제를 모았던 연유는 내용의 심오함이 아니었다.

일단 구어체와 비속어의 적극적 활용이었다. 아마 당대에는 고상한 문체가 주류이었던 듯하다. 그것을 셀린느가 소위 판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셀린느가 쓰고자 하는 내용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겐 사실적이고 비속함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방법이 필요하였다. 또한 극도의 비관주의적 분위기다. 작품에서 간혹 드러내는 실소적 장면을 제외하면 소설은 철저히 어둡고 암담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힘겹고 고달픈 삶, 거칠고 부조리한 세상. 그것은 양차 세계대전의 불안한 세계에 대한 작가와 세인의 암울한 전망을 반영한다.

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불구경이라고 한다. 한밤중에 활활 타올라서 모든 것을 전소시켜버리는 불길의 압도적 강렬함과 뜨거움은 사람들을 도취시키는 매혹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불 꺼진 현장을 다시 가본 이가 있는지? 지난밤의 황홀한 추억은 찾기 어렵다. 온통 재투성이에 타고남아 무너져버린 잔해와, 시꺼멓게 그을린 흔적 등. 여기에는 오로지 씁쓸함만이 입가에 감돈다. 이것이 셀린느의 작품을 읽는 소감이다.

당대인에게는 열광적으로 호응 받고 도취감을 주었을 뿐더러 진부함을 타파하고 생경한 신선함의 우물물을 문학에 쏟아 부은 소설. 시대정서를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명 비판적 원대한 깊이를 제시해준 작품.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자체로 진부하다. 통시대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문학작품은 고전으로 살아남지 못한다. 셀린느의 이 작품도 이 시험대 위에서 오락가락한다. 대중의 평가는 당대성에 기우는 듯하다. 오늘날 그의 작품 중 유통되는 번역본이 달랑 이 한 편임이 입증하듯이. 하지만 간단히 외면하기에는 무게감이 제법 만만치 않다. 어찌할 것인가?

※ 참고로 이 책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간략한 작품 연보가 전부다. 따라서 셀린느의 이 작품에 대한 분석에 관심있다면 <피카레스크 소설>(이가형/민음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저자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전체적 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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