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깨어지기 쉬운 인간의 가치에 전율을 느낀다]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이 책은 언뜻 21세기의 한국과는 전혀 무관하게 보이기 쉽다.

다수의 국민이 평화를 사랑하며, 악을 미워하며 이웃과의 다정한 교감을 지니며 행복한 삶을 살며, 서로의 출신과 신앙을 존중하는 모습.

이러한 삶의 양태는 또한 보스니아 국민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일년전에, 몇개월 전만 해도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수십만의 사망자를 낳게될 전쟁으로 귀결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못했다.

어제의 이웃사촌이 나에게 총을 쏘며, 사돈간에 한쪽은 무슬림이고 하나는 세르비아이기에 등을 돌렸다. 사람들-무슬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을 살인하고, 방화하며, 재산을 몰수하며, 부녀자를 강간할 수 있는 권한이 세르비아인에게 주어졌다. 희생자의 아우성 소리는 미국과 유럽 등 서방지도자들의 외면으로 묻혀져 버렸다.

피터 마쓰는 세르비아의 행위가 유태인에 대한 나치독일과 다를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구 유고연방 사람들이 정신적, 문화적으로 열당하기에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항변하고 싶지만, 그렇게 우기기에는 아직 우리의 얼굴이 충분히 두껍지 못하다.

어느 시대나 아무리 평화로운 시기에도 항상 내부갈등은 존재하였다. 그 갈등은 때로는 거의 없는듯 느껴지다가도 한순간에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되살아난다. 이것이 터지냐 아니냐는 갈등을 약삭빠르게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려는 개인이나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 지역갈등이 전혀 없다고 하긴 어렵다. 망국병이라고 지탄을 받아 지금은 가라앉은 상태지만,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무리가 정치와 군대와 언론을 장악하고 서서히 국민을 세뇌시킨다면 보스니아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피터 마쓰는 조금도 잘난체 하지 않는다. 때로는 총구 앞에서 조용히 몸을 돌리고, 빗발치는 총탄을 피하기 위해 재빠르게 바닥을 기면서 그는 보스니아를, 무슬림을 그리고, 선량한 세르비아인을 안타까와한다.

야수는 바로 문명 옆에 있다. 그리고 문명의 틈을 노린다. 악이 비집고 들어와 퍼지는 것을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수수방관하고 이를 국제사회가 용인한다면, 야수는 세계 곳곳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지만 단호히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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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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