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이라는 매춘부이야기
다니엘 디포우 지음 / 세계문학 / 1996년 4월
평점 :
품절


<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다니엘 디포의 다소 이색적인 소설 작품이다. 여기서 이색적이라 함은 <로빈스 크루소>로만 작가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의외로 다가올 수 있음이다. 물론 디포 자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무인도 표류기가 특이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책의 해설과 같이 사회 소설로 분류될 수 있으며, 또한 피카레스크 소설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몰 플랜더즈라고 불리는 한 여인의 일생의 회고담 형식을 빌리고 있다. 몰 플랜더즈의 삶은 전형적인 피카라, 즉 여성 피카로의 그것이다.

작품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부분은 몰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다룬다. 중간 부분은 하녀로 들어간 지주 집안에서 연애와 결혼으로 시작되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남성 편력(?). 셋째 부분은 드디어 몰 플랜더즈라는 유명한 도둑으로 명성을 날리는 시기이며, 마지막 부분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유배길에 오르는 장면이다.

남성 피카로의 일탈 행위는 초기에 가난, 나중에는 사회적 반발심에 기인한다. 즉 그는 피카로의 삶을 떨쳐버릴 수 있음에도 능동적으로 피카로의 삶을 선택한다. 여기서 베티 부인이 몰로 전락하는 과정도 가난에 기인한다. 특히 그녀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서 경제적 궁핍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미약하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남들보다 우월한 몸뚱아리,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외모를 수단으로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줄 남자를 끊임없이 구한다. 그 기간은 수년에서 짧게는 한 번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옮긴이는 몰을 매춘부로 낙인찍는다. 몰 자신도 스스로를 매춘부라고 인정한다.

형무소에서 죄수의 딸로 태어나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에게 사회적 도덕관념과 높은 양심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녀는 너무나 일찍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정조보다 금화에 얼굴이 환해지고 시선이 향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기대를 품고 몸을 맡겼던 장남 대신 그의 동생과 결혼한다. 비록 금전의 유혹으로 시작되었지만 장남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자못 순수하였다. 다만 자신의 말마따나 그 사랑은 과도하고 무절제하였다(P.66). 어쨌든 동생과의 결혼 생활이 길게 이어졌다면 그녀는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았을 터이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는 외톨이가 되었다. 돈 많은 젊은 미망인으로.

이후 그녀의 삶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안전판을 마련하려는 처절한 분투의 노력이다. 단순히 정부와 남편의 품을 그리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남편 없는 삶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솔직히 많은 재산을 은행에다 맡겨두고 이자만으로도 편하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텐데도. 제인 오스틴이 젊은 여성들이 좋은 결혼에 목매다는 당시의 경향을 고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거의 일백 년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몰이 살았던 당대를 보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적 관념은 거의 종교적 신념이었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이 사회 소설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페미니즘적 시각에도 연유한다. 작가는 몰의 입을 통해 남성 편의적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여성의 낮은 사회적 대우를 질타한다.
“...여자의 위치는 이미 너무나 처참한 것이다. 여자들은 스스로 보통 이하로 자신의 위치를 낮추고 있다. 예전부터 그들 스스로를 비하시킴으로서 남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수치를 겪어오고 있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P.81)

몰의 인생은 원제의 타이틀처럼 행운과 불운의 연속이다. 세 번째 남편과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여기서 그들의 행복을 깨뜨릴 외적 요인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친남매 간임을 알게 된 것이니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사랑함에도 헤어지고 만다. 다섯 번째 남편인 은행가와도 그녀는 비교적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누렸지만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나름 안온한 삶도 완전히 깨지고 만다.

이렇듯 그녀는 끊임없이 생활의 안정을 갈구하였지만 운명과 사회는 그녀의 삶이 평온하게 꾸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은행가와의 결합에 앞서는 그녀는 자신의 무절제한 삶을 반성한다.
“가난이라는 악마의 가장 악랄한 유혹에 의해 나는 다시 타락의 생활로 돌아가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나의 필요성을 채우는 타락한 매춘 뚜쟁이가 되었던 것이다.” (P.187)

이제 질식한 것 같은 가난으로 몰락한 그녀에게 남은 길은 무엇인가? 우리말에도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힘겹게 삼년의 시간을 버티어내었고 더 이상은 견딜 여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나이도 오십을 넘겨 미모에 기댈 수도 없는 형편. 결국 몰 플랜더즈의 길로 자연스레 이끌리게 된 것이다.

이쯤해서 작품의 구조적 측면을 생각해보면 무척 흥미롭다. 오십년에 걸친 그녀의 생을 기술하는데 소요된 분량은 180면 정도이다. 그런데 이중 상당량은 그녀의 성적인 무절제와 자칭 부도덕하다고 일컫는 어두운 면에 할애되어 있다. 첫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몇 줄에 지나지 않고, 행복했던 셋째 남편과의 경우도 근친상간 관계임을 알고 절망하며 다투는 장면에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음에도 유복한 결혼생활에는 한두 면을 할애할 정도로 인색하다. 이후에도 밝고 행복한 대목보다는 어둡고 부정한 대목의 묘사에 작가는 노력을 경주한다. 이 작품이 몰 플랜더즈의 일생의 어두운 잘못을 회고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후의 전설적인 도둑 겸 소매치기로 유명하게 되기까지의 그녀의 잇따른 성공담에 대한 상세한 보고의 함의가 궁금하다. 장장 70면에 걸친 그녀의 갖가지 도둑질 장면은 마치 대도가 자신의 성공담을 의기양양하게 술회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를 작가의 내밀한 의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외관상 당대의 도덕률과 검열을 의식하여 몰의 부도덕과 불법을 지탄하고 있지만 작가는 내심 그녀에게 자신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녀의 도둑질을 통해 당대 런던 사회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효과를 노리기도 한 게 아닐까?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들은 결코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는 하층민이다. 상류층은 자신들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하류층은 목을 치켜세우고 끊임없이 높은 곳만 바라본다. 세상은 왕과 귀족, 지주들만 사는 게 아니라는 단순하지만 간과된 사실을 일깨우는 것,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도 충분히 인식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낮은 목소리. 그것이 피카레스크의 본령이며, 사회소설의 출발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독자들도 허구보다는 교훈적인 사실에 그리고 단지 이야기로 생각하기 보다는 현실 적용에 그리고 주인공의 인생보다는 작가의 결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희망해 본다.” (P.13)

또한 작품 말미에도 이렇게 몰의 입을 통해 술회하고 있다.
“나의 인생의 이야기를 이렇게 출판하는 것은 생의 모든 부분에 대한 도덕성을 위해서이다. 혹은 모든 독자들에게 교훈, 주위, 경고, 혹은 성장을 주기 위해서이다.” (P.314)

정말로 이 소설은 교훈을 주기 위하여 창작되었을까? 몰은 이따금씩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주저와 후회의 상념을 슬쩍 비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멈추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다. 몰은 결국 뉴게이트 형무소에 잡혀가 교수형이 선고되었음에도 용케 처형을 모면한다. 가벼운 도둑질도 목숨을 대가로 바치는 판국에 그녀는 참회와 회개의 눈물로 목사를 감동시켜 ‘유명한’ 도둑이자 상습범임에도 유배형으로 형량이 낮추어진다. 이것이 도덕성과 교훈에 부합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그녀의 유배 생활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녀는 도둑질로 마련한 돈으로 땅을 사고 농장을 꾸려서 오히려 지주, 즉 농장주가 된다. 여기다 결합하지 못했던 제미, 즉 랭커셔 남편과 재결합을 하고 많은 돈을 벌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 늘그막에 영국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이것이 정말로 회개의 삶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물론 작가는 마지막까지도 방어막을 치는데 소홀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가 살았던 죄많은 생을 진정으로 회개하며 여생을 살기로 했다.” (P.329)

디포의 <몰 플랜더즈>는 부도덕한 피카라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워 개인의 부정과 불운한 삶은 물론 여성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취약성으로 인한 세상의 풍파를 도덕성이라는 외피에 숨겨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몰 플랜더즈가 나면서부터 창녀이자 매춘부가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몰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너무 낯간지럽다. 이것이 디포가 노리는 숨은 의도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이 소설은 당대는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도 굉장한 문제작이다.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의아스럽다. 재평가가 필요하다.

현재 있는 유일한 번역본은 그나마 절판된 지 오래인지라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다. 게다가 번역 자체도 솔직히 추천할 정도가 못 된다. 단순히 영한사전을 펼쳐놓고 글자 대 글자, 문장 대 문장으로 번역한 듯 하며, 번역투도 매끄럽지 못하고 딱딱하여 전문번역가의 작업치고는 함량 미달이다. 보다 좋은 번역, 제대로 된 대우를 절실히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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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세븐 2014-07-0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때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아닌가요? 우리나라로는 영조 시대쯤일텐데, 저런 제목으로 책을 냈다니 놀랍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