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의 거장들 - 볼프강 슈라이버의
볼프강 슈라이버 지음, 홍은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음반 평론가 중에 레너드 번스타인과 오자와 세이지를 무척 혐오하는 이가 있다. 혹자는 그들을 일컬어 지휘대 위의 원숭이라고 비하하기조차 한다. 그가 경애하는 지휘자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등이다. 아, 그는 카라얀도 무척 싫어한다.
 
과거 안동림 교수나 이순열 등의 영향으로 나도 초기부터 카라얀을 무시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음반가게마다 카라얀으로 대표되는 노란딱지의 도배에 반감이 있었던 연유도 크다. 어쨌든 클래식 음악의 진수는 베토벤과 브람스 등 독일 고전주의이며, 이들의 음악은 푸르트벵글러 등의 깊은 정신성을 가진 지휘자의 연주를 통해 진정한 묘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음악에서 정신성을 강조하는 사조의 눈으로 보자면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로린 마젤, 오자와 세이지, 제임스 레바인 등은 하찮은 이류 지휘자들로 분류된다. 베를린 필하모니커의 수장으로서 사이먼 래틀의 능력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들도 꽤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음악을 왜 듣는가 하는 원초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음악과 미술을 포함한 예술 장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서 출발한다. 보아서 즐겁고 들어서 즐거워야 함이 예술의 근본 덕목이다. 물론 약간의 노력을 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아서 괴롭고 들어서 괴롭다면 예술의 자격을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리라. 진지한 성찰은 철학만으로 충분하다. 음악은 철학도 형이상학도 아니다. 음악은 언어와 글자가 아니라 순간에 울려퍼지는 음을 매개로 소통을 한다.
 
모두가 베토벤이고 푸르트벵글러일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와 로시니에 환호하며, 바그너와 베르디에 갈채를 보낸다. 때로는 옷깃을 여미며 바흐의 종교곡에 집중하다가도 텔레만의 식탁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모든 지휘자에게 푸르트벵글러의 깊이와 클렘페러의 무게를 강요하지 말자. “기분좋게 만들고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무엇을 느끼게 해주는 것”(P.60)이 주빈 메타의 스타일임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LA 시절의 메타만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잦아들게 된다. 다니엘 바렌보임을 자클린느 뒤 프레의 불행과 연관하여 인간적으로 비난한다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의 다른 면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21세기의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독단적 카리스마를 부정한다. 그 점에서 지휘자의 심각한 철학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악단과 청중이 모두 순수한 음악 자체를 즐기게끔 노력하는 사이먼 래틀이 어떤 면에서는 더욱 뛰어나다.
 
볼프강 슈라이버는 지휘자의 계보를 죽 훑어나가지 않는다. 과거의 거장 지휘자의 일화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자신만의 구분으로 종과 횡으로 지휘자들의 세계를 재단하여 독자에게 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음악적 관점을 헤아리도록 한다. 그에게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 못지 않게 클라우디오 아바도도 위대한 지휘자이며, 제임스 레바인도 탁월함에서 뒤지지 않는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세르쥬 첼리비다케는 말할 나위도 없다.
 
흔히 이런 유형의 저작물들이 빠지기 쉬운 거장성에 함몰되지 않고 타계하거나 활동중인 지휘자를 고루 조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크나큰 미덕이다. 당대의 지휘자들이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면서 현대에 맞게 새로운 변용을 도모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다.
 
이 책이 나의 클래식 음악 내지 지휘자의 편견과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극제의 역할을 준데 대하여 기쁨을 느낀다.
 
* 그래도 카를 뵘과 로브로 폰 마타치치가 소개되지 않은데 대하여 저자에게 불만을 나타내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3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2.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