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테노리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6
호세 소리야 이 모랄 지음, 정동섭 옮김 / 책세상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 후안>의 무수한 아류작 중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 것이 이 <돈 후안 테노리오>로서 원작 출시 후 2백여 년이 경과한 후다.

돈 후안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거침없는 여성 유혹과 편력의 대담함과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무모함에 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종교는 삶의 모든 것을 규율하고 지배하는 무거운 질곡이 되기도 하였다. 돈 후안은 종교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대중의 내심을 잘 반영하였다.

호세 소리야의 <돈 후안 테노리오>는 선배에게서 주인공을 빌려 왔을 뿐 작품의 전개와 성격, 분위기, 결말 등 모든 면에서 차별화를 도모하고 있다. 물론 극작품이라는 장르적 성격은 동일하다.

티르소의 돈 후안이 여성 유혹자임을 자부하지만 극중에서는 불과 4명 만을 유혹하는 데 그치는 반면, 호세 소리야의 주인공은 돈 루이스 메히아와의 악한 대결에서 72명의 여성을 정복하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 다만 티르소는 극중에서 유혹 장면을 보여주지만, 호세 소리야의 작품에서는 극중 유혹 장면은 단 한 명, 도냐 이네스 뿐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돈 후안의 도냐 이네스 유혹이 이야기의 중심을 끌어간다. 양가의 아버지 간에는 정혼이 구두합의가 되었으나 돈 후안의 파렴치함을 목도한 기사단장 돈 곤살로가 파혼시킨 예비 수녀, 이것이 도냐 이네스의 모습이다. 그녀는 나면서부터 수녀원에서 생활하여 세속의 티끌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의 현신으로 묘사된다.

돈 후안은 그녀의 약혼자임을 이용하여 접근하고 납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무구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려 기사단장의 발에 무릎을 꿇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이 전작과의 차이점이다. 전작의 돈 후안은 끝없이 신에게 도전하고 경멸하지만 후자의 돈 후안은 신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돈 후안과 돈 루이스의 회동 장면에서 우리는 돈 후안 자신의 입으로 그의 장문의 악행 리스트를 듣게 된다(P.38~42). 판소리 <흥부가>에서 형 놀부의 심술 대목의 나열을 연상시키는데 정도는 훨씬 심하다. 이러한 그가 도냐 이네스를 만나고 소위 개과천선을 바라지만 돈 곤살로가 용납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제 존재를 새롭게 하며 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악마였던 자를 천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P.154)

“그렇지 않으면 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늘 그래왔던 그런 과거의 사람, 지금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될 겁니다.” (P.153)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돈 후안은 돈 곤살로와 돈 루이스를 죽이고 떠나며, 도냐 이네스는 아버지의 죽음과 돈 후안의 떠남에 정신을 잃고 영원히 쓰러진다. 완전한 비극!

2부에서는 돈 후안의 귀국과 묘지가 된 자신의 저택, 돈 곤살로와 도냐 이네스의 석상이 주 배경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냐 이네스의 존재이다. 티르소의 작품에서 기사단장의 딸은 도냐 안나로 그녀는 아버지 몰래 모타 후작과의 만남을 꾀한다.

호세 소리야는 이를 도냐 이네스로 대치하는데, 단순 대치가 아니라 돈 후안 못지않은 중요한 캐릭터로 격상하고 있다. 그녀는 단테에게 베아트리체, 파우스트에게 그레트헨과 같은 구원의 여인상이다. 석상의 초대로 무덤에서 지옥으로 끌려가려는 돈 후안. 마지막 순간 그는 신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도냐 이네스가 나타나 돈 후안의 영혼을 구원한다.

호세 소리야는 선배의 그늘을 의식하지만 결코 이에 가려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돈 후안의 성격의 새로운 규정, 도냐 이네스라는 여인의 창조, 이를 통해 독자는 전작의 편력적 구성의 산만함에 비해 남녀 주인공에 집중된 보다 극적인 흐름을 느낄 수 있고 그들의 엇갈린 운명에 탄식을 흘리다가 마침내 주인공의 구원에 안도의 한숨과 갈채를 보낼 수 있다.

전작에 비해 분량이 많지만 오히려 읽어나가기는 훨씬 용이하다. 연대적 차이가 언어적, 문화적으로 보다 접근을 용이하게 하며, 아울러 작가의 글쓰기가 한층 대중친화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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