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 나남신서 327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전황은 급격하게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린다.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다시 힘을 내고 파죽지세로 북한군을 몰아붙여 마침내 압록강 도달이 멀지 않을 정도로 승세를 탄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당시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공개적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군의 동태를 고려에 넣지 않았다. 자국의 국경이 위협받는 것을 방관치 않겠다는 모택동의 경고를. 모두가 낙관적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을 때 중국군 대부대가 국경을 넘어 험준한 산악에 매복하고 있었으며, 단 한 번의 역공으로 서부전선의 8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10군단은 장진호반에서 엄청난 수의 중국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모두가 그들의 전멸을 예상하였다.

이 책은 10군단, 특히 주력인 해병 제1사단이 자신의 몇 배나 달하는 적군을 물리치고 무사히 흥남으로 철군하는 처절한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논픽션이다. 저자 자신이 당시 해병대원으로 참전하였기에 자신의 청춘 시절의 잊지 못할 체험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전우들에 대한 눈물겨운 헌정이기도 하다.

당시 해병 제1사단의 후퇴작전(해병들 스스로는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라고 주장한다)의 기적적인 성공은 한국전쟁의 전세에 두 가지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해병 제1사단이 무너지지 않고 퇴각함으로써 중국군에 대항할 전투력을 상실하지 않았으며, 또한 장진호로의 공격과 후퇴 도중에 맞닥트린 중국군 최소 6개 사단 이상의 전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일거에 남진하려던 중국군의 전략에 지장을 주었다. 서부전선의 중국군 공세만만으로도 서울을 재포기할 정도였으니 만약 해병 제1사단이 아니었으면 동부전선의 중국군마저 공세에 합류하여 그야말로 유엔군은 전쟁 자체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는 게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모든 해병 개인들이다. 그들은 최악의 순간에도 상관과 동료와 자기 자신을 믿었으며, 자신이 해병임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자부심은 특별한 데가 있다. 그것은 육군(소위 땅개라고 그들이 무시하는)에 대한 해병대의 우월성을 자각하는 데서 나온다. 그들의 모토는 Sempre Fidelis, 즉 언제나 충성으로서 적군에게 밀리는 것을 치욕으로 알았으며, 후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전장에서 비겁한 행동을 한 병사는 그들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였다.

평시의 인명 사고는 뉴스거리가 된다. 전쟁이 발발하면 더 이상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의 목숨도 숱하게 희생당하며, 적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적을 먼저 죽여야 내가 살아남으며 높이 평가받는다. 그래서 전쟁은 인간을 비이성적 존재로 만든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천명에 가까운 전사 내지 실종자가 발생하였는데, 중국군은 3만 명 가까이 전사하였다. 해병대의 혁혁한 전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한편 유엔군과 중국군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떠나 한국이라는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목숨을 바치게 만든 인류의 야만성이 새삼 두려워진다. 그들은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동토의 설국에서 동상에 몸의 감각을 잃어가면서 참호에서 무슨 상념을 품었을까?

전쟁은 개인적 감상을 용납지 않는다. 전쟁은 집단적 힘과 힘의 전면적 대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의 결과에 환호하며, 전쟁 영웅을 우상시한다. 전쟁에서 영웅이란 무엇인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것에 다름 아니다. 평시에서는 사형에 처해지지만, 전시에서는 훈장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장에 선 병사 하나하나의 개인에 대해 무심하다. 오로지 전투의 결과, 전장의 성패가 주목받는다.

이 책은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개개인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전반적인 전략적 패배 속에서 이루어낸 일련의 전술적 승리(P.611)였다. 미국 대중들은 한국전쟁에 무심하다. 오죽하면 잊혀진 전쟁이겠는가. 설혹 관심 있는 이들도 병사들이 한국전에서 어떠한 고초를 겪었는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선에서 그들의 심경은 무엇이었는지 무심하다.

저자는 장진호 전투가 가진 역사성과 동료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충성과 헌신을 되새긴다. 익명으로 취급된 병사들 하나하나를 역사 속의 살아 숨쉬는 존재로 부활시켜 마치 눈앞에서 그들이 떠들고 농담하다가도 불현 듯 소총을 부여잡고 눈발이 휘날리는 엄동설한에 능선으로 돌격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앞으로 전쟁 영화를 더 이상은 무심히 보지 못할 것 같다. 단순한 영화로 여겨지지 않고 전투원 개개인의 아픔이 내게 뼈저리게 다가온다. 고통스럽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