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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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학사상 영원한 인간형으로 일컬어지는 돈 키호테, 햄릿, 파우스트, 그리고 돈 후안[또는 돈 환, 돈 주앙]. 그 돈 후안의 원형이 바로 이 작품 <돈 후안,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이다. 돈 후안은 후대에 많은 오마쥬를 낳았다. 몰리에르, 푸쉬킨 등 문학적 후배는 물론 음악에 있어서도 모차르트와 리햐르트 쉬트라우스가 표제를 붙였다. 무수한 예술가와 독자를 끌어들인 작품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걸까?

돈 후안은 여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인물이다. 극중에서는 겨우(?) 4명의 여성을 유혹하고 비록 1명은 실패하고 마는데 그치지만, 유혹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위선의 가면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혹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냉혹함과 비열함마저 드러낸다.

작가는 돈 후안이 석상에 초대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결말을 통해 악덕을 저지른 불신자의 최후를 경고하는 종교적 도덕적 교훈을 표면적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원형적 인물 돈 후안의 캐릭터 창조에 있다.

돈 후안의 성적 방황은 자포자기와 체념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성적 유린을 통해 얻는 찰나적 쾌락에 의해서만 현세의 삶을 유지해 갈 에너지를 보급 받는다. 그는 세상에 별다른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감히 신에게 도전적 언사를 거듭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주위에서 그의 악행에 대한 신의 분노를 경고하는데 대한 반응이다.

“그래, 정말 오래도록 참아주는군!” (P.49)
“정말 오래도록 내버려 두시는군!” (P.52)
“죽어서까지 그렇습니까? 참으로 오래도록 봐주시는군!” (P.77)
“죽을 때 큰 상을 내리시려는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P.103)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P.106)
“그나저나 당신도 참 인내심이 강하오.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P.120)

돈 후안은 신도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과 담대함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뻔뻔스러운 무모함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석상과 만찬을 나누며, 기사답게 석상의 무덤으로의 초대를 회피하지 않는다.

“두렵다는 단어를 썼소? 나한테? 당신이 지옥 자체라 해도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소이다.” (P.129)

그리고 돈 후안은 불신자로 죽어간다.

다른 측면에서 이 작품은 당대 여인들의 행태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기도 하다. 유혹된 네 명의 여인은 모두 당대의 도덕률에 비추어 볼 때 흠결을 지니고 있다. 이사벨라 공작부인은 정혼자 옥타비아인 줄 알고 몸을 허락하지만 이들은 아직 혼전이다. 티스베아는 신분의 차이와 남자의 겉과 속이 다른 속성을 알면서도 신분 상승의 욕구에 이를 눈감는다. 이 점에서는 아민타와 그녀의 아버지 가세노도 마찬가지다. 한편 유혹에 속지 않은 도냐 아나는 어떠한가? 그녀는 아버지의 의사에 반해 모타 후작에게 마음을 주고 심야에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돈 후안은 자신의 남성적 매력과 여성들의 허영심을 적절히 조합하여 유혹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불신자로 징계받은 자>는 전자보다 더 극적이다. 전자가 단일한 주인공의 단일한 성격으로 시종여일 일관하는데 반해 복수의 주인공이 등장하며 그들은 선과 악의 변신을 넘나든다. 이 점에서 평면적 구성의 전자에 비해 입체적인 구성미와 성격묘사가 크게 부각된다.

여기서는 신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수도사 파울로와, 세상의 온갖 악을 저지르지만 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무뢰한 엔리코가 처음부터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파울로가 선일 때 엔리코는 악이었으며, 파울로와 엔리코가 중간에 모두 악을 행하다가 마지막에 엔리코는 선으로 구원받지만 파울로는 끝내 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지옥불에 빠진다.

파울로와 엔리코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신학적 논점은 별로 관심이 없다.

엔리코는 한마디로 사회악(194면~199면에 걸친 엔리코 자신의 악행의 진술을 들어봐라)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의 연민과 사랑은 그가 절대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하느님이 저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란 저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조차 그분의 자비로움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P.254)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위대하시다. 그분의 자비하심에 경배를! 그 자비하심으로 나 구원받으리!” (P.277)

파울로는 10년간을 수도했지만 악마의 유혹에 빠져 타락자의 길로 들어선다. 신은 파울로의 타락을 방관하였다. 이는 그가 순간적으로 교만의 죄에 빠졌다는데 연유한다. 악마는 절묘하게 이 틈을 노렸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하느님을 믿기보다 의심하는 데 더 힘을 쏟고 있지.” (P.166)

흔들리는 어린 양을 악마에게 방치하기 보다는 천사의 보살핌으로 어루만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니면 엔리코와는 달리 어차피 파울로는 악에 넘어갈 운명이었던가? 악마의 유혹에 비해 꼬마 목동은 너무 약하다.

“의로웠지만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았던 이를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나는 세상의 재앙이 될 겁니다.” (P.204)

“주님, 제가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주님을 벌써 저를 심판하셨으니, 이제 다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렵니다.” (P.205)

나는 여기서 파울로라는 인물에 동정심을 품는다. 그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기 쉬운 보다 인간적인, 어떤 측면에서는 보다 근대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신성과 이성 사이의 흔들림은 종교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종교에서는 오히려 무지하지만 신성에 대한 몰입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파울로에서 나와 멀지않은 고독한 현대인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티르소 데 몰리나의 뛰어난 점은 탁월한 성격 창조에 있다고 하겠다. 돈 후안과 파울로라는 대조적인 불멸의 캐릭터. 그는 진정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에서 로페 데 베가와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중간을 잇는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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