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르자빈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가브릴라 데르자빈 지음, 조주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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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데르자빈이 누구인가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다. 푸쉬킨의 일화 중 아직 학생이었던 푸쉬킨의 시재(詩才)에 감탄하였다는 당대의 대시인이 바로 데르자빈이다. 이는 곧 당대 문단에서 데르자빈의 위상을 알려준다. 이 책은 데르자빈 시 총 110편 중 31편을 수록하고 있다.

 

작품해설도 그렇고 수록작을 살펴봐도 데르자빈의 시 작품은 크게 송시와 아나크레온풍 서정시로 양분된다. 수록작 중 송시는 <권력자들과 재판관들에게>, <메셰르스키 공의 죽음>, <>, <폭포>, <펠리사>이며, 아나크레온풍의 시는 <꿈속의 나이팅게일>, <포도주>, <저녁 초대>, <침묵>, <시골 생활>, <첫 이웃에게>, <철학자들: 술 취한 사람과 안 취한 사람>, <러시아 처녀들>, <황제 마을에서의 산책>이 해당한다.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에 속하지 않는 기타 개별적인 작품들도 몇 편 포함되어 있다.

 

1804년 아나크레온 시집의 출판은 러시아 시사에서 대사건으로 간주됨. 19세기 러시아 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 줌. 19세기 비평가 벨린스키는 이 시집을 러시아 서정시의 진주라 칭송. (P.198, 지은이 연보)

 

데르자빈의 서정시를 굳이 아나크레온풍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생의 후반부에 아나크레온풍 시집을 출간하여서다. 여기서 데르자빈은 고대 그리스 시인을 본받아 현세의 삶, 사랑, 쾌락에 대한 예찬을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표현한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몇 편의 예를 드는 것만으로 그의 시풍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난 삶을 즐기고 / 애인에게 자주 자주 키스하며 /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을 거다. (P.18, 꿈속의 나이팅게일)

 

심장에 달콤한 포도주는 / 사랑스런 입술의 키스처럼 우리에게 달콤하리라. / 너는 부드러운 여인, 사랑스런 여인 / 나에게 그렇게 키스해 다오, 내 사랑아! (P.20, 포도주)

 

내가 건강하고 / 먹고 마실 수 있다면 / 나는 부자요, 나의 힘이 지속되는 한 / 밀레나와 장난치며 사랑을 즐길 것이다. (P.43, 시골 생활)

 

지독한 슬픔이 오기 전에 / 마시고, 먹고, 즐겨라, 이웃이여! / 이 지상에서 우리는 시간을 서두르며 산다. /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 쾌락은 오직 순결일 뿐이다. (P.50, 첫 이웃에게)

 

송시는 어떤 인물, 사건, 장소 등을 기리기 위한 성격이므로, 시인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읊은 서정시와는 완연히 구별된다. 데르자빈이 시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게 26260행의 송시 <펠리사>를 발표하면서부터였고, 대표작인 <폭포>는 무려 74444행에 달한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이 책 분량의 1/3에 해당할 정도로 시인이 송시에 쏟는 노력을 짐작게 한다.

 

그의 송시는 권력자들과 재판관들을 통렬히 비난하거나(<권력자들과 재판관들에게>), 당대 최고의 부자인 인물의 죽음으로 죽음의 본질을 직시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거나(<메셰르스키 공의 죽음>), 신을 찬미하고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운명을 대비(<>)한다. 그의 송시 중 <펠리사><폭포>는 따로 논할 가치가 있다.

 

<펠리사>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키르기스-카자흐 무리들의 여왕인 펠리사에 비유하여 예찬한다. 시인은 예카테리나를 신에 육박하는 위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여제는 그야말로 모든 군주의 전범이기에 펠리사의 영광은 신의 영광”(P.143, 22)이라고 대놓고 칭송한다. 요즘 관점으로는 권력자에 대한 낯간지러운 아첨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당대 러시아인들과 당대 조선인들의 인식 수준으로 보면 순수한 찬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쨌든 시인은 덕분에 여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가져오는 일은 /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왕이시여! (P.137, 13)

 

진실과 양심이 함께 있는 곳이 어딘가요? / 선행이 빛나는 곳이 어딘가요? / 바로 당신의 옥좌가 아닌가요! (P.144, 24)

 

<폭포>는 방대한 분량으로 단번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처음에는 폭포 자체를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이어 이 시가 어떤 인물을 기리기 위함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인간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시인은 폭포를 끌어들인 것이다.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의 정체는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밝혀진다.

 

그대는 죽을 운명의 인간 중에 가장 용감한 자! / 지략으로 비상하는 이성이로다! / [......] / 그대는 기적의 지도자, 포툠킨! (P.116, 47)

 

이 송시는 포툠킨[포템킨] 장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다. 그는 오스만과의 전쟁을 통해 크림반도 일대를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시켜 그토록 소원이던 흑해 진출과 부동항 확보를 이룬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유력한 애인으로 거의 황제와도 같은 권력을 누렸다고 전한다. 훗날 그의 이름을 기려 러시아 전함을 명명하였고, 근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그의 유해를 반출한 행위 모두 그가 범상치 않았음을 입증한다.

 

이외의 작품 중에서는 시인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기념비>가 재밌다. <등불>은 데르자빈이 해고당했을 때의 우울한 심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의 순수함과 정당한 노력이 무참히 깨지는 묘사를 통해 자신이 당한 처지를 나타낸다. <희망>은 시인의 첫 번째 부인의 이름과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희망을 주창하는데, 별다른 설명은 없지만 혹시 첫 번째 부인의 죽음 또는 불행을 기리기 위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상>은 최만년작으로 말년의 심경을 잘 나타낸다.

 

옮긴이 해설은 데르자빈의 시 세계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하고 있어 다소 전문적이지만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푸쉬킨을 가능케 한 러시아 근대 시문학의 원류를 확인하였고, 주요 송시와 특히 아나크레온풍의 시에서 문학적으로도 큰 흥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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