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지만지 희곡선집
데니스 폰비진 지음, 조주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폰비진의 대표작이자 당대 풍자 희극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표제 미성년은 미성년 미트로판을 가리키는 동시에 당대 러시아 사회 수준이 미성년 단계임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풍자를 하려면 풍자 대상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프로스타코프 일가가 그 역할을 떠맡는다. 프로스타코프와 그의 아내 프로스타코바 여사, 아들 미트로판, 처남 스코티닌. 작가는 대놓고 비웃기 위해 이들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유형화한다. 시골 지주 귀족, 극도로 무식한데다 하인과 농노 착취를 기본권으로 인식할 정도다.

 

(프라브딘) 안 됩니다. 부인, 누구에게도 그들을 학대할 권리는 없소이다.

(프로스타코바 여사) 그럴 권리가 없다고요! 귀족이 하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럼 귀족의 특권에 관한 법률은 대체 뭐예요? (P.152, 54)

 

집안의 실권을 틀어쥐고 남편을 때리기도 하며 온갖 횡포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프로스타코바 여사는 무식의 극치이자 그것을 오히려 당당하게 여길 정도이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가족과 신의도 일고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고아가 된 소피야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서 남동생과 결혼시키려고 하다가 삼촌 스타로둠이 막대한 유산을 남길 거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아들 미트로판과 맺어주려고 표변한다. 스타로둠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자 납치하려는 대담한 범죄행각을 벌일 정도다. 이런 그녀를 손쉽게 좌지우지하면서 기생하는 브랄만이 오히려 대단하게 보일 정도다.

 

그런 그녀가 꼼짝 못 하는 존재가 아들 미트로판인데, 극 중에서 그는 완연한 바보로 행동한다. 가정교사 셋이 달라붙어 수년이 지나도 글쓰기와 셈하기 실력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아들을 너무나 애지중지하는 프로스타코바 여사는 오히려 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공부할 가치가 없다고 억지 주장이다.

 

(프로스타코바 여사) 학문이란 그런 게 아니야. 너를 힘들게 한다면, 모든 게 필요 없지 뭐. 돈이 없다면 뭘 셀 수 있겠니? 돈이 있다면, 파프누티치 없이도 잘 셀 수 있다. (P.91, 37)

 

어떤 의미에서 미트로판 역시 희생자다. 엄마의 과중한 기대와 풍요로운 지주로서의 삶 속에서 어쩌면 수더분하게 살아갔을 수도 있었을 그는 만사가 실패하고 집안이 몰락하게 되자 결국 엄마에게 폭발한다.

 

(미트로판) 엄마, 따라다니면서 날 귀찮게 좀 하지 마, 젠장...

(프로스타코바 여사) 아니 너도! 너마저 날 버리는구나! ! (기절한다.) (P.163, 58)

 

작품의 가장 마지막 문장으로 희극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는, 스타로둠이 이게 바로 악덕의 정당한 결과로다!”(P.164, 58)라고 탄식하는 악덕은 비인간적인 농노제와 잘못된 교육제도이다.

 

누나 못지않게 악독하고 무식한 스코티닌은 프로스타코바 여사와 유사하지만 독특한 행동 패턴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사람보다도 돼지에 더욱 열광한다. 그가 내뱉는 주요 대사는 항상 돼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가 소피야와 결혼하고자 하는 이유도 그녀 자체보다 그녀 마을의 돼지가 유달리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폰비진은 노골적으로 그와 돼지를 동격화한다.

 

(스코티닌) 그것도 아니에요. 내가 진짜 바라는 건, 그녀의 마을에 살고 있는 거예요.

(프로스타코바 여사) 그게 뭐지?

(스코티닌) 누나, 난 돼지를 좋아해요. 이 주변 마을에 돼지들이 얼마나 큰지. (P.18, 15)

 

(스코티닌) 그 돈으로 난 온 세상의 돼지를 다 살 거요. 듣고 있소? 난 모든 사람에게 소문을 낼거요. 그곳에 돼지들만 살고 있다고. (P.41, 23)

 

이들 일가와 반대 측에 놓인 인물들은 스타로둠, 프라브딘, 밀론이다. 소피야와 더불어 이들은 성년러시아를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고결한 정신과 높은 품격, 올바른 양심, 분별력 있는 용기 등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스타로둠의 도덕론은 응당하면서도 지루하다. 그는 프라브딘과, 밀론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지혜와 영혼을 알아보고 교감을 한다. 관리로서, 군인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을 기대하는 모습은 단지 스타로둠뿐만 아니라 이 희극을 접하는 모든 독자와 관객이 마찬가지이리라. 나아가 스타로둠은 도덕적이고 계몽적인 군주의 의무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과연 정치적 성격을 지닌 대사다.

 

(스타로둠) 왕관을 쓸 자격이 있는 군주는 국민들의 영혼을 고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P.142, 51)

 

다만 과도한 설교와 훈계가 이 극을 교훈극 또는 도덕극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음은 분명하다. 해설에 따르면 당대 관객은 오히려 스타로둠의 장광설에 열광하였다고 하는데, 시대적 사회적 환경이 오늘날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오늘날 이 작품의 가치는 부정적인 인물 군상들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당한 자기 옹호와 과시에 있다. 그들이 자부하고 드러내는 말과 행동은 그들 자신에게는 더없이 훌륭하고 뛰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독자에게 그들 스스로의 결점과 악덕을 한층 두드러지게 보여 줄 뿐이다.

 

작품 자체의 정치적 풍자성을 논외로 한다면 차라리 앞서 읽은 <여단장>이 더욱 흥미롭다. 인물의 과도한 전형화라는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보다 인간적이며, 모든 인간이 제각기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하는데 독자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비웃지 못하는 묘한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충실한 작품해설은 역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부록의 ‘18세기 러시아 연극 이해<미성년>에 실린 것과 같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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