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세 파블리오 선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장 보델 외 지음, 김찬자 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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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앞선 중세 소극과 마찬가지로 책[작품]을 읽고 난 감흥보다는 소개 자체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내가 참고하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가람기획)파블리오를 이렇게 적고 있다.

 

파블리오는 주로 13세기에 유행한 약 150종 가량의 각각 독립된 운문으로 씌어진 이야기로서, 짧은 것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콩트의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80)

 

이 책은 프랑스 중세에 유행했던 파블리오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해설에 따르면 비교적 잘 알려진 20편을 엄선하였다고 하니 대표적인 파블리오는 모두 수록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네 명의 옮긴이의 노력뿐만 아니라 전혀 의외로 화려한 표지와 삽화를 채용한 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파블리오에서는 세련된 궁정풍 문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계층의 삶이 소개된다. 이문학이 주는 즐거움은 이야기에 산재되어 있는 사실적인 묘사에 있다. (P.258)

 

파블리오에 대해 보충하자면, 8음절 운문체 형식의 웃음을 주는 짧은 이야기라는 점이다. 주로 음유시인들이 지어서 낭송하였기에 운문을 택하였으며, 왕공에서 주로 대중에 이르기까지 청중 앞에서 구술되었으므로 흥미진진함과 재미는 필수 요소라고 하겠다. 작가들은 예외는 있겠지만 서민들과 삶과 호흡을 같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중세 서민들의 삶의 양태가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파블리오의 내용은 저속하고 음란하며 감정 곡선이 솔직하다. 인물들의 언행도 품위와는 무관하게 야비하고 노골적이며 본능과 욕구에 충실하다.

 

본능과 욕망 실현을 위해 인물들은 체면과 도덕을 가리지 않는다. 필요하면 상대방을 기만하기 일쑤고 그것은 작품 속에서 상찬받아 마땅한 덕목이 되기도 한다.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나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속임수를 노리며, 남의 여인을 유혹하고 탐하기 위해 야밤 잠행을 무릅쓰는 망신스러운 행동에는 농부는 물론 신학생과 경건한 성직자도 예외는 없다. 수록작 중에는 특히 성직자들의 여색과 물욕에 관련한 내용이 많은데 성직자의 위선에 대한 반감과 함께 실제 성직자들의 행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남을 속이는 데 특별한 목적 없이 단순히 즐거움과 재미를 노리는 일도 있으며, 구두쇠 상대방의 불친절에 강력한 보복을 날려서 통쾌함을 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착오를 소재로 웃음을 추구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인물들의 면면을 나열하면, 장님, 성직자(신부/주교 등), 푸줏간 주인, 매춘부와 기둥서방, 부르주아 여인, 기사, 도둑, 농부, 영국 왕, 신학생 등 각층이 전부 포함된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폭소를 터뜨릴까? 아마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인물이 위선의 가면을 벗고 까불다가 된통 창피를 당하는 장면에서 시원한 웃음을 쏟아내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성()과 관련한 내용이 많다는 것은 당연하리라. 누구나 원하고 좋아하지만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누구에게는 금단의 영역인 그것. 기독교가 지배하는 엄숙한 중세 사회라고 해서 서민들마저 근엄하게 도덕적이라는 기대는 금물임을 파블리오는 보여 준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물들은 기회 있을 때면 성적 쾌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아내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강조하는 일부 작품은 특히 여성의 외도 우려에 전전긍긍하던 남성들의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음을 알려 준다. 물론 윤리의식에 철저한 인물도 있기에 아무 데나 들이대면 안될 텐데 일순간의 즐거움을 도모하다가 앞뒤 가리지 않다가 호되게, 심지어 목숨마저 잃는 딱한 처지에 놓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개별 작품을 유형별로 잠시 살펴보면 <콩피에뉴의 세 장님>은 세 장님과 신부, 그리고 여인숙 주인을 속이는 교활한 성직자를 다룬다. 이처럼 성직자가 사건을 일으키거나 단초가 되는 이야기는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염색된 사제> <에스토르미> <사제와 알리송> <바이열의 농부> <브뤼냉, 사제의 암소> <성당 관리 수도사> <당나귀의 유언>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이 해당한다. 신학생도 같은 범주로 취급하면 <공베르와 두 신학생>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도 마찬가지다.

 

()을 제재로 한 이야기는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프로뱅의 부아뱅> <머리 타래> <염색된 사제> <에스토르미> <사제와 알리송> <바이열의 농부> <공베르와 두 신학생>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 <성당 관리 수도사>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이다.

 

아내가 남편을 속이는 내용도 제법 있는데,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 <머리 타래> <> <바이열의 농부>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부인> <성당을 세 바퀴 돈 부인> <의사가 된 농부>가 그것이다. 남성 지배 구조를 뒤엎는 전복의 미학이 여기에 있다.

 

속임수, 사기, 기만 요소가 담긴 작품은 수록작 거의 모두라고 할 만하다. 이런 요소가 없는 드문 이야기가 <에튀라> <옹트의 가방> <당나귀를 모는 농부>. 언어유희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에튀라><옹트의 가방>을 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은 파블리오로, <아베빌의 푸줏간 주인>은 선량한 푸줏간 주인이 욕심 많은 사제에게 철저한 복수로 되갚으며, <에스토르미>는 유부녀를 넘보던 세 사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가운데 에스토르미가 고군분투하며, <성당 관리 수도사>도 비슷하다. <에메와 바라>는 도둑 형제와 정직한 농부 간 치열한 두뇌 대결이 펼쳐진다. <의사가 된 농부>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둔 농부가 아내의 꾀에 넘어가 위기를 겪고 부유하게 되고 마침내 아내를 부드럽게 사랑하게 된다는 드물게 보는 부부의 해피엔딩을 보여 준다.

 

파블리오 작가들의 진정한 의도는 <콩피에뉴의 세 장님>이 밝힌 것처럼, 교훈을 주는 것보다는 삶에 대한 즐거움을 주고 실존의 불행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P.262)

 

이 점을 고려한다면, 파블리오 작품이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더불어 중세 서민 사회 이해를 향한 열린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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