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단장 지만지 희곡선집
데니스 폰비진 지음, 조주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푸쉬킨이 러시아 문학을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최초의 문호이지만, 그가 맨땅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폰비진은 푸쉬킨에 앞서 희곡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18세기 러시아 작가다. 폰비진의 대표작은 <여단장><미성년>이라고 하는데, 두 편 모두 희극이라는 점이 독특하며 푸쉬킨과 다른 면이다.

 

특이한 표제는 이 작품이 여단장 가족과 고문관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붙인 것처럼 보인다. 여단장 부부와 고문관 부부는 시골에서 비슷한 신분으로서 교류하며 자신들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려고 한다. 딸은 사랑하는 남자가 있지만, 가난하기에 청혼을 거절당한 처지다. 흔한 관계의 구성으로 보이지만, 작가가 힘주고 있는 대목은 극적 구성과 대사의 깊이가 아니다. 고문관의 딸 소피야와 도브롤류보프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은 죄다 전형화된 희극적 속성을 띠고 있다. 다소 인위적이고 기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희화화는 어쩌면 이 작품을 읽는 묘미가 될 수 있다.

 

가부장적 여단장과 금전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아내, 프랑스풍에 매몰된 아들. 이해타산에 재빠른 고문관과 생활 무능력이며 우아하고 고상함을 추구하는 아내. 이들이 벌이는 대조적인 대사와 행동의 교차와 맞부딪힘이 흥미롭다. 이런 유형의 작품을 탐탁잖아 하는 일부 독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들) 내 불행은 단지 당신이 러시아인이라는 거예요.

(고문관 아내) 나의 천사여, 물론 그것은 내게도 무서운 파멸이지요. (P.53, 26)

 

일차적으로 프랑스에 영혼을 팔린 아들이 말끝마다 불어를 사용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을 살짝 무시하는 태도, 불어를 모르는 여자랑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은 작가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명백하다. 이것은 단순한 애호의 수준이 아니라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불행시하고 있을 정도다. 여기에 프랑스를 무조건 숭상하는 고문관 아내의 짝짜꿍이 이어지다 보니 예비 사위와 예비 장모가 오히려 눈이 맞는 지경에 이른다.

 

(고문관) 당신 부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여단장)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신 부인이 가장 현명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소. (P.105, 47)

 

여단장은 우아하고 고상한 고문관의 아내에게 마음이 끌리니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의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막장 구조다. 고문관은 자기와 생활 코드를 맞아떨어지는 여단장 아내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녀에게 구애하나 문제는 여단장 아내는 금전 관련 사안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 못하는 형국. 이렇게 비틀린 사랑의 엇갈림이 난무하기에 도덕적 기준으로는 썩 마뜩잖다. 그런 면에서 소피야와 도브롤류보프는 작품 내에서 둘뿐인 긍정적인 인물군이지만, 흥미 측면에서만 보면 별로 흡인력이 없다.

 

그 외에도 여단장의 거친 폭력성이 반복되어 나타남을 비판할 수 있고, 고문관의 입을 빌어 누구도 해독하지 못할 글을 쓰는 서기라든지 판사와 친해지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등의 당대 러시아의 치부를 사정없이 까발린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상투적이기에 당혹스럽다. 등장인물은 첫 막부터 끝 막에 이르기까지 한 표정의 가면을 쓴 채 획일적으로 무대를 돌아다닌다. 무대 밖 관객의 역할은 극작가가 원하는 대로 어리숙하고 희극적인 인물을 마음껏 웃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폰비진은 혹시 관객에게도 등장인물 못지않은 전형적인 역할을 배정한 것이 아닐까.

 

고전극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여단장>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인물의 성격화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P.142-143, 해설)

 

낯선 작가, 낯선 작품이므로 해설이 풍부하다. 작품해설과 작가소개는 대부분 책에 있기에 새삼스럽지 않지만 작품해설의 양과 질은 상당하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풍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세태에 대한 풍자, 그리고 인간의 속물성에 대한 비웃음이 작품에서 두드러진다고 한다. 서로들 흠결이 있음에도 자신은 잘난 체하고 타인을 마음껏 비웃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독자는 이전투구 내지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사례를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부록으로 <18세기 러시아 연극 이해>는 러시아 연극의 발전과정을 개술하고 18세기에 수마로코프를 시작으로 크냐지닌, 폰비진을 위시하여 러시아 연극이 어떻게 근대화하였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어 작품 배경 이해에 매우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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