헵타메론 : 열 번째 이야기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지음, 이다희 옮김, 이다혜 해설 / frame/page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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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은 원체 유명하고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이것의 형식을 모방한 16세기의 <헵타메론>은 문학사에서나 등장할 뿐 그동안 번역본이 없기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작품이었다. 수년 전 번역본이 나왔는데, 뜬금없이 달랑 10번째 이야기만 싣고 있다. 옮긴이도 중세 문학의 전공자가 아니라 기획 의도가 궁금하였기에 기획자의 글을 확인해본다.

 

이 책은 72편의 단편이 담겨있는 <헵타메론> 중 열 번째 이야기만을 새롭게 엮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루카 구아다니노, 2017)과 영화의 원작인 소설 <그해, 여름 손님>(안드레 애치먼, 2007)에서 중요한 소재로 언급됩니다. (P.7, 기획자의 글)

 

영화 개봉에 맞추어 원작의 소개 차원에서 출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단편적이나마 원작의 내용을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 책을 읽는다. 솔직히 말해서 내용 자체는 그다지 독특하거나 새롭지 않다. 중세 배경으로, 귀부인과 기사의 궁정식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나 할까. 다만 부분적인 일화가 아니라 주인공 아마두르와 플로리다의 슬픈 사랑과 생을 오롯이 담고 있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아마두르는 플로리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추후 남편이 아닌 연인의 자리를 얻고 싶었다. (P.30-31)

 

아마두르는 플로리다를 사랑하지만, 신분상 차이로 결혼을 꿈꿀 수는 없기에 연인으로 남기를 꿈꾼다. 플로리다 가까이에 머물며 그녀의 얼굴을 날마다 볼 수 있고, 그녀와 스스럼 없이 친밀하게 대화하며 정서적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자체로서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겠다는 아마두르. 신붓감도 그런 까닭에 플로리다와 가까운 아반투라다를 고르는 대목에서는 대단한 노력에 감탄하면서도 치밀함과 집착의 실마리마저 엿보인다.

 

서두에서 아마두르는 빼어난 인품과 태도, 외모를 지닌 젊은이로 소개되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독자는 그가 선행과 악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되는 장면을 마주치게 된다. 사랑의 집착은 이렇게 훌륭한 영혼마저 변질시키는 마력을 지님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으로 더 이상 플로리다 가까이 머물 수 없게 되자 그는 이성을 잃는다.

 

플로리다에 대해 숨겨온 욕망, 그리고 더는 그와 교제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휩싸인 아마두르는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결심했다. 플로리다를 아주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P.59)

 

원치 않는 결혼에 대한 실망감으로 아마두르와 명예로운 사랑으로 상실감을 채우려던 플로리다로서는 아마두르와의 육체적 관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사랑을 둘러싼 영과 육의 대조성은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플로리다는 아마두르에게 실망하고 그와 냉랭하게 거리를 둔다.

 

아무튼 이제 됐습니다. 당신에게 약간의 선의라도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경솔했다면, 이제는 진실을 알 때가 되었지요. 그 덕분에 당신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고요. (P.67)

 

사랑의 실패는 집착을 유발하고 이는 이성과 도덕의 제어를 벗어난다. 아마두르는 이후 플로리다를 갖기 위해 여러 수단을 쓰고 강제로라도 그녀를 범하려고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기독교 기사로서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남편과 연인을 동시에 잃은 플로리다는 수녀가 되고 만다는 슬픈 결말.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를 들은 참견인들의 논평이다. 무엇보다 아마두르를 어떤 인물로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각자 의견을 개진한다. 플로리다를 강제로 겁박한 점은 옳지 않기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 혹자는 아마두르에게 매정한 플로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처럼 자신에게 성실하게 봉사한 기사에게 가혹하다는 것이다. 당대 많은 귀부인이 기사 연인을 두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한편 플로리다가 아닌 스페인의 기독교 기사로서 프랑스와, 그리고 이슬람과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행동에서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원작을 언급한 소설과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변용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으로 플라토닉 러브는 남녀 사이에 일반화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더군다나 한창 청춘인 선남선녀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일 때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기에, 아마두르와 플로리다는 애초에 불가능한 길을 택한 것이다. 사랑의 호르몬이 분출되는 순간 이성은 마비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 뛰어난 아마두르가 타락하는 과정을 지켜봐라.

 

선의의 피해자도 생기게 마련이니, 아반투라다의 삶은 과연 행복하였을까. 아내의 사랑을 얻지 못한 카르도나 공작은 어떠하였을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열 번째 이야기는 남녀 사이의 엇갈린 사랑의 귀결을 이야기함을 깨닫게 된다.

 

덧붙인다면 아무쪼록 <헵타메론>의 온전한 번역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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