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렐류드 - 찬란한 추억의 정원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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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어린 소녀

2. 딜 피클

3.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

4. 오락가락하는 마음

5. 프렐류드

6. 독일인들과의 식사

7. 피곤한 로저벨

8. 레지널드 피콕 씨의 하루

9. 최신 유행 결혼생활

10. 가든파티

11. 미묘한 마음

12. 항해

13. 죽은 대령의 딸들

14. 첫 무도회

15. 카나리아

16. 6년 뒤(미완)

 

<차 한 잔>에 이은 코호북스의 맨스필드 단편선 두 번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맨스필드의 주요 작품을 연대순으로 골고루 수록하였다. 이 두 권의 책이면 맨스필드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미 읽은 작품인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 <피곤한 로저벨>, <최신 유행 결혼생활>, <가든파티>, <항해>, <죽은 대령의 딸들>, <첫 무도회>는 여기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으련다.

 

맨스필드의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가정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하고 깨뜨리는 존재다. 자신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 역량과 자질을 넘어서 가부장 체제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는 것으로 굴레 지운다. 그런 면에서 <어린 소녀>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이 두려움에서 긍정(아직 사랑까지는 아니다)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이채롭다.

 

가부장제 속 결혼 생활은 남편과 아내 사이를 불평등하고 상호 소통 불가능하게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만에서>와 마찬가지로 쌍둥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렐류드> 속 린다는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남편의 존재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출산과 육아, 가정의 속박에 갇혀 있어야 하는 본능적 거부감에서다.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모든 것이 극명해졌다. 그녀가 그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이 뚜렷하고 명백하고 진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증오심은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진짜였다. 이 감정들을 조그만 주머니에 담아서 스탠리에게 건네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감정은 깜짝 선물로 주고 싶었다. (P.109)

 

결혼 생활이 행복한 것인가 설문조사 해보면 의외로 압도적인 긍정 답변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행복해야 하고 실제로 행복할 것을 기대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부간이 원수 사이로 전락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레지널드 피콕 씨의 하루>에서 레지널드가 날마다 고민하고 번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라리 남이었다면, “친애하는 숙녀분이라고 부르면서 비즈니스적으로 행동할 수라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결혼 생활의 일 극단의 모습을 바로 <최신 유형 결혼생활>에서 엿볼 수 있다. <독일인들과의 식사>에서 화자가 끝내 서둘러 식사 자리를 떠난 이유도 비슷하다. 영국과 독일이라는 긴장된 국가 정세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정주부의 역할 인식 강요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젊은 남녀는 항상 짝을 갈구한다. 호르몬 작용이라는 생물학적 원인 외에 사회적, 경제적 이유도 결코 간과하지 못한다. 여러 면에서 더 우수한 짝을 고르려는 본능과 현실과의 부정합, 사랑과 사랑의 엇갈림, 사랑의 성취에 대한 이성 간의 접근 차이 등 연인 관계는 삐거덕거릴 개연성을 항상 품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마음>의 바이올라는 미혼여성의 한 경향을 대변한다. 그녀의 마음 태도를 뭐라고 할 필요 없다. 그녀는 결국 연인 캐시미어를 이해하지 않는가. 그녀가 캐시미어를 떠났다면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의 선택에 회한의 탄식을 내뱉었을지 모른다. <딜 피클>의 그녀처럼.

 

,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이런 행복을 감히 내팽개치다니. 세상에서 그녀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을 떠나보내다니. 이제는 너무 늦었나? 영영 기회를 놓친 걸까? 그녀야말로 그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는 장갑과도 같은 처지였다. (P.22)

 

이처럼 오락가락하고 미묘한 마음은 우정에서 애정과 사랑으로 진전되는 마음에서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은 물론 상대방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면 사랑에 싹튼 청춘들이 흘리는 고뇌의 눈물은 훨씬 줄어들었을 테니.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은 물론 <미묘한 마음>에서 우정으로 충만했던 두 사람이 문득 거리감을 느끼고 불편함에 어색하며 마음속 아픔을 깨닫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우리는 부자연스러울 뿐이다. 사랑, 갈등, 다툼, 헤어짐, 그리움, 재회의 사이클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상대방을 우리 자신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이 내게 상처를 입혔어. 내 가슴을 찢어놓았어.’ 그녀의 심장이 말했다. ‘왜 안 가는 거야? 아니, 가지 마. 여기 있어. 아니야, !’ 그녀는 어둠이 내린 바깥을 내다보았다. (P.192)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 자체도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든파티>는 파티와 죽음이 병치되어 있는 현실을 나직한 씁쓸함으로 그려낸다. 로라를 제외한 다른 식구는 이웃 남자의 죽음을 무관하게 인식하지만, 로라는 뭔가 옳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녀는 망설이고 현실 타협을 합리화한다. 삶은 참 그렇지. 라는 모호한 인식은 로라 남매뿐만 아니라 맨스필드가 독자에게 던지는 경구다. <첫 무도회>의 레일리가 느끼는 희비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인생에 슬픔이 내재해 있다고 해서 내내 슬퍼만 하고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에 슬픔이 존재한다고 섣불리 생각할 수 있는가.

 

그 달콤하고 명랑한 노랫소리 아래 결국 이런 것이, 슬픔이 존재한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들은 그것은. (P.257)

 

<프렐류드>는 이 책의 수록작 중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한다. 구성과 내용 면에서 <만에서>와 짝을 이루며 서로 보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린다는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으며, 베럴은 자신의 처지에 침울하고 조바심을 낸다. 그녀의 불행과 숨겨진 욕망은 훗날 <만에서>에서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6년 뒤>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결국 무엇을 작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미완작이므로 분명하지 않다. 그들 부부의 항해가 이것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도.

 

이제 캐서린 맨스필드 작품의 독서는 여기서 끝낸다. 시중의 몇 권에서 아직 읽지 않은 단편을 산발적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주요한 대다수를 읽었기에 아쉬움은 없다. 맨스필드를 읽기 전에 <가든파티>라는 낭만적 표제는 뭔가 여성적이고 가정적인 반짝거리는 재미와 아름다움을 줄 거라고 지레짐작하였다. 생소하고 이질적인 문장의 전개에 잠시 당혹스러웠지만 그녀 특유의 무뚝뚝하지만 미묘하면서도 차갑지는 않은 냉소적인 표현에 매료되었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며 그녀 작품세계를 마무리한다.

 

기승전결식 플롯의 부재와 모호한 결말 때문에 맨스필드의 작품은 때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야기에서 누구나 알아보고 동조할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당혹스럽거나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맨스필드는 플롯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를 찾고자 한 선구자이자 모험가였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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