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프랑수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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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요정 파데트>, <마의 늪>에 이어 계속 읽는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이다. 목가적이니, 전원풍이니 하면 시골과 자연 속 아름답고 낭만적인 정경만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도시와 시골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이런저런 성격과 사고, 행동 유형 그리고 관습과 문화가 섞이고 부딪치기 마련이다. 어찌 조화와 평화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서도 시골의 아름다움보다는 환경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한 개인의 뛰어난 자질이 유독 돋보인다. 바로 사생아프랑수아다. 여기서 먼저 정리할 대목이 있는데, ‘사생아란 표현이 버려진 아이 또는 고아를 지칭하며, 통상적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전통 사회에서 사생아는 부정적 존재로 인식되고 취급되기에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한다. 작품 내에서도 사생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여러 폄하적 발언이 반복된다.

 

다른 사생아들은 그들의 숙명 때문에 거의 항상 굴욕적인 삶을 살아갔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애당초 기독교인으로서의 긍지마저 박탈당한 인생이란 것을 너무나 가혹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사생아들을 그들을 낳아 준 사람들에 대한 증오 속에서 자라났다. (P.77-78)

 

주인공 프랑수아는 다르다. 물론 블랑셰 부인의 거둠과 보살핌, 부인 자신의 온후한 인품의 영향을 받은 점에서 유리할 수 있지만 결국 세인의 은연중 괄시와 냉대를 극복하고 멋진 청년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수아 자신의 미덕과 노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세베르 부인이 그를 유혹하려고 시도했으며, 자네트도 그를 자신의 남편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냉정한 시어머니, 방앗간 사업에 무심한 데다 드러내놓고 외도까지 하는 남편, 와중에 점점 어려워지는 살림살이를 힘겹게 이끌면서 지탱해가는 블랑셰 부인. 여기서 독자는 당대 시골의 삶이 결코 관념적이거나 이상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들렌은 놀라서 사생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아이의 두 눈 속에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눈빛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더없이 선하면서도 더없이 의연한 그 무엇인가에 이끌려 마들렌은 어안이 벙벙했다. (P.46)

 

블랑셰 부인의 프랑수아를 향한 보살핌과 애정은 매우 순수하고 따뜻한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프랑수아의 말과 눈에서 아마 그녀는 프랑수아의 참다운 인간성을 발견하였으리라. 그녀는 프랑수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하지만 남편과 주변 사람은 그렇게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블랑셰 부인을 비방하려는 악의적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남녀 사이, 게다가 훌쩍 멋진 청년으로 성장한 프랑수아와 블랑셰 부인의 나이 차는 십여 세밖에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발언을 통해 볼 때 십여 세 연상연하의 결혼은 당대에 드물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모함과 우려도 결코 허튼소리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블랑셰 부인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프랑수아도 결정적 계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머니로서 사랑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순수한 모성애이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제아무리 프랑수아가 뛰어난 청년이라고 하더라도 인위적, 우연적 요소가 추가되지 않았다면 소설은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가 시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읽고 쓸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었다는 점, 나중에 생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프랑수아는 남편의 빚과 죽음으로 몰락한 블랑셰 부인과 방앗간을 되살릴 수 있었고, 이제 그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블랑셰 부인과 대등한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농민]의 노고, 지주들의 땀 한 방울, 돈 한 푼 들어가지 않은 경작의 대가로, 그 땅의 가치가 두 배로 오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다시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힘없는 잉어들은 늘 대어의 사냥감이 되고, 우리의 탐욕 때문에 벌을 받는다. (P.186)

 

프랑수아가 세베르 부인의 음모를 파헤치고 블랑셰 부인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작가는 시골 토지 소유와 관련한 부조리를 고발한다. 시골 농민은 소작농으로 열심히 경작하지만 거의 모든 대가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돌아간다는, 어찌 보면 인류사에서 항상 되풀이되지만 근원적 해결이 어려운 현상. 이 작품이 사회고발 소설이라면 이 사안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겠지만, 작가는 더 이상의 진전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프랑수아와 마들렌, 즉 블랑셰 부인의 결혼이라는 설정이다.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일관 혈연에 근거한 모자 관계에 준하는 돈독한 가족에 가깝다. 마들렌은 프랑수아를 큰아들로, 프랑수아는 마들렌을 어머니로 여겼다.

 

마침내 마들렌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프랑수아는 그녀가 자기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데 대해 무릎을 꿇고 감사했다. (P.246)

 

모자간의 애정이 갑작스럽게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사랑의 성격이 일순간에 완전히 뒤바뀌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인정해야 가능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두 사람의 사랑은 언제부턴가 남녀 간의 사랑이었지만 외관상 모자간의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위장하였다는 것. 후자가 진실에 가깝다면 블랑셰가 우려하고, 세베르와 마리에트가 주고받은 대화는 근거가 있는 셈. 자네트는 프랑수아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깨우쳐 준다.

 

마들렌이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프랑수아의 생각이 그러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악마에 걸고 부인하던 마들렌의 변심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러한 사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어도 내 관점으로는 흔쾌히 인정하기 어렵다. 내가 애들이 말하듯 틀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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