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 희곡선 범우문고 169
세네카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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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세네카 희곡을 읽는다. 그래봤자 서점가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달랑 2권뿐이다. <테렌티우스 희곡선>과 마찬가지로 옮긴이의 약력을 보건대 일본어 중역판으로 추정된다. 문고판이 싫다면, 아리스토파네스와 테렌티우스의 희극을 포함하여 작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동일한 번역자에 의해 재출간된 통상적인 판형이 있음을 적어둔다.

 

<아가멤논>은 아이스킬로스 작 동명 원작의 모작이다. <힙폴뤼토스>는 에우리피데스 작 동명의 모작인데, ‘히폴리투스’, ‘힙폴리투스라는 표기도 있다. <힙폴뤼토스><파이드라>라는 다른 표제명도 있는데,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극 중 역할의 중요도와 비중을 고려하면 후자가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오래전에 <그리스 비극>이라는 단권의 책을 읽은 기억만이 있어 원작과 세네카의 모작과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다. <일리아스> 속 그의 모습은 영웅답지 않지만 어쨌든 십 년에 걸친 원정을 성공리에 끝내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이다. 문제는 그의 부재중 아내 클루타임네스트라가 외도를 하였다는 점이다. 아가멤논의 개선 소식이 들려오자 그녀는 어쩔 줄 모르다가 정부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아이기스토스는 오히려 그녀를 부추겨 아가멤논을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두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아가멤논은 남편으로서도 국왕으로서도 평이 썩 좋지는 않다. 클루타임네스트라는 자신에 대한 무심함과 여러 여성을 후처로 들이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말한다. 아이기스토스는 왕의 자질을 평한다.

 

(아이기스토스) 트로이가 아직 건재했을 때에도 동포들에게 무례했던 그가 그 나라의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교만해졌는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소. 그는 미케네의 왕이었소. 그러나 앞으로는 미케네의 폭군이 될 것이오. 그의 공로가 영혼을 취하게 만든 것이오. (P.31, 2)

 

전쟁영웅 아가멤논은 초라하게 귀국한다. 폭풍우에 표류하여 승리자가 아닌 패전자의 모습과도 같다. 이는 로마 제국이 트로이의 후손이라는 인식에 따른다. 로마인에게 있어 그리스는 조상의 나라를 무너뜨린 적국인 셈이다. 따라서 빛나는 영광을 그들에게 비춰줄 필요가 없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영웅이되 영웅이 아닌 것 같은 모습으로 아내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한다. 포로로 잡힌 카산드라는 이를 예감하고 운명을 예언한다.

 

(카산드라) 한 국왕이 추방자의 손에 의해 죽을 거예요. 남편이 아내를 유혹한 자에게 피살될 거예요. 모든 일은 언제나 운명대로 이루어져요. (P.69, 5)

 

인간의 삶은 철저하게 신에 예속당한다. 트로이의 멸망도, 아가멤논의 죽음도 모두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며, 일개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클루타임네스트라 역시 신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셈이다.

 

(코러스1) , 거짓된 운명이여, 그대는 어찌하여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 왕들만을 따라다니느뇨./ 그대가 그들을 권력의 정상에 올려놓은 것은 / 끝내 절벽 위에서 지옥의 심연으로 / 떨어뜨리기 위함인가. (P.17, 1)

 

<힙폴뤼토스>는 전처소생의 자식과 계모 간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저승으로 모험을 떠나고 수년간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계모 파이드라는 힙폴리투스를 향한 사랑을 참을 수 없다. 사냥과 숲속 생활을 좋아하며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덕망 높은 미소년인 힙폴리투스를.

 

(코러스) 그는 우리들의 혈관 속에 사랑의 불을 질러요. / 그리하여 그 열기로 우리의 몸을 망쳐 놓죠. / 그는 밖으로 드러나게 큰 상처를 / 입히지 않아요. / 그러나 그 열기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 깊이 스며들어 온통 마음을 휘저어 놓아요. (P.97, 1)

 

인간의 마음, 특히 사랑이 자유의사가 아님을 신화는 에로스의 화살로 형상화한다. 그 화살에 맞는 순간 제우스조차도 저항할 수 없는데 파이드라에게 모자지간이라는 윤리는 방패막이 되기엔 너무 연약하다. 불꽃 같은 애정을 힙폴리투스에게 고백하지만 정작 그는 화살에 맞지 않았으니 순결한 힙폴리투스가 단호하게 거부함은 자명한 이치.

 

뜨거운 사랑과 차디찬 증오는 원래 한 끗 차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미움도 큰 법이다.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구애를 거부한 데 복수하기 위해서 이제 사랑하는 이는 제거할 이가 되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원작과 모작이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원작은 파이드라가 유서를 남긴다고 하는데, 세네카는 파이드라가 직접 무고하도록 변형한다. 테세우스의 저주로 힙폴리투스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파이드라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연인의 시신 옆에서 자살하고 만다. 힙폴리투스가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파이드라) 나는 그리운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나는 사랑에 미친 연인이에요. 나는 스틱스의 파도 위까지, 타르타로스의 심연까지라도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그래서 먼저 죽은 당신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겠어요. (P.153, 5)

 

<아가멤논><힙폴뤼토스>의 모든 등장인물은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율 의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들과 전혀 무관한 신이 정해놓은 무정한 운명에 좌우되는 것이다. 피해자인 아가멤논과 힙폴리투스, 가해자인 클루타임네스트라와 파이드라가 모두 결국은 운명의 희생자이다. 코러스는 불륜에 빠져 힙폴리투스를 죽게 만드는 파이드라의 죄악을 맹렬하게 비난하지만, 나약한 인간인 파이드라에게 차마 돌을 던질 만한 무모한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세네카는 인간 운명을 지배하는 신의 의지의 강력함과 이에 굴복할 수 없는 가련한 인간의 숙명을 원작보다 한층 두드러지게 개작하였다. 인간의 의사와 관계없이 악을 자행하도록 만드는 게 신의 의지라면, 우리는 그 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불행의 신, 죄악의 신 그것은 악()을 지칭함이다. 강력하고 무자비한 악이 인간사에 어떻게 존재하고 그것인 인간 존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세네카는 그리스 비극 모작을 통해 탐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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