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키
존 윈덤 지음, 정소연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트리피드의 날>의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국내에 존 윈덤의 소설은 이렇게 딱 두 편만 나와 있다. 일단 분량이 두껍지 않고 내용과 문체가 평탄하여 읽어나가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머릿속에 인간 아닌 존재가 들어와 원래와는 다른 인간이 되는 현상, 이것을 이 책에서처럼 귀신들림이라고 지칭하든 아니든 간에 여러 심령 소설의 주된 소재이다. 지구상의 인간 아닌 외계의 다른 존재가 지구를 방문하여 인간과 접촉하는 설정 역시 숱한 공상과학 장르의 단골 소재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게 1968년이니 아마도 이런 유형의 작품에서는 선구자 격이라고 할 것이다.

 

초반부의 낯설고 당혹스러운 예감, 그것은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공포스러운 요소가 뒤따를 것이라는 불안 섞인 전망에 기인한다. 초반의 불안한 압박감을 견뎌내면 이후 작가가 제시하는 방향이 뜻밖에도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이때부터 독자는 혼란스럽다. 이 소설의 지향점에 대해서, 초키라는 존재의 정체와 작가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혼자 중얼거리는 점만 제외하면 주인공인 평범한 열두 살 매튜는 초키에게 여러 혜택을 받는다. 갑작스러운 지적 능력의 제고, 예술적 안목과 솜씨의 향상, 무엇보다 물속에서 맥주병 신세였던 그가 동생의 목숨마저 구할 정도로 선수급 수영 실력을 발휘한다. 매튜의 관심은 넓어지고 사회 인식과 책임감도 증가한다. 한마디로 초키는 인간을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다는 점이 이 소설의 색다른 특징이다.

 

이 대화가 끝난 후에 나는 돌아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당신과 말하고 싶었다. 이 말을 들으면 당신은 기쁠 것이다. 매튜 부모의 다른 부분, 즉 엄마, 즉 당신의 아내는 더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두려워하고 내가 매튜에게 해롭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나를, 즉 당신을, 즉 매튜를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없으므로 유감이다. (P.229-230)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미친 사람이라는 꼬리표다. 이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이 화형을 당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된 역사적 기억이 그리 멀지 않다. 미친 사람은 사회 내 정당한 일인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폴리가 피프를 만들어내고 함께 지냈던 것은 아직 아이 때였기에 가능하였다. 매튜는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나이다.

 

매튜는 초키와의 공생이 익숙해짐에 따라 그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반면 매튜의 부모는 초키의 존재를 한사코 부정하려 애쓰고 노심초사하기에 급급하다. 특히 매튜 엄마는 비이성적으로 보일 만큼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에 더욱 애틋하다. 아니기를 믿고 싶은 마음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려 들고, 진실을 드러내는 발언을 하는 이, 즉 랜디스에게 거부감마저 일으킨다.

 

다행하게도 공포소설이 아니기에 우여곡절 후에 초키는 매튜에게서 떠나간다. 그가 매튜의 아빠에게 자신의 정체와 강신 목적 등을 매튜의 입을 통해 밝히는 제11장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여기서 매튜의 안전을 위해 그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사유와 더불어 초키는 예언자적 풍모를 보인다.

 

모든 지성체를 양성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이다. 이성의 가장 단순한 불꽃도 횃불이 되리라는 기대로 키워야 한다. 좌절한 지성의 굴레를 풀어야 한다. 생각이 좁은 지성에게는 넓힐 힘을 주어야 한다. 높은 지성은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머물렀다. (P.234)

 

인간 지성에 대한 찬사, 한층 높은 차원의 지성 고양을 위할 필요성과 사명, 매튜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다짐. 조금씩 나아가기에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퍼즐이 풀리는 날이 오리라는 확신을.

 

이제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지. 여기저기에 힌트를 하나씩 뿌리고, 한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는 순간적인 영감을, 어느 날 모여서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 해롭지 않을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퍼즐은 언젠가 풀리리라. 비밀은 밝혀지고 은폐되지 않으리라...오랜 시간이 걸린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마 아니리라. 그러나 그런 날은 온다...온다... (P.247)

 

작가의 집필 의도를 헤아려 보고 싶다. 심령현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작가는 랜디스와 토르비 경에게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작중에서 그들은 초키가 확실하게 실재하는 존재임을 증빙하는 역할을 맡았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역시 제11장의 예언자로서의 초키가 핵심인가? 그의 예언은 갑작스럽다. 후반부까지 여유롭고 굴곡 없이 진행되던 흐름에서 작가는 서둘러 결말을 내리고 작품을 끝맺으려고 한다. 초키의 예언 대목이 작품 전체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고 겉도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게 비단 나뿐인지 궁금하다. 오직 작가만이 진실을 알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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