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진경문고 5
정민 지음 / 보림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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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은 내게 무엇보다 <한시미학산책>의 저자로 친숙하다. 오래전에 사놓고도 서가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어 빚진 심정이 들고 마음이 아프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한시를 제재로 삼고 있는데, 독자층을 초중등생을 하여 좀 더 쉽게 풀어쓰려고 있다. 서두와 말미에 지칭하는 벼리는 저자의 초등학생 아들이라고 한다.

 

잠깐 구성을 훑어보면 열아홉 개의 장을 나누고 각 장마다 한시의 묘미를 다채롭게 음미할 수 있도록 이야기 형태로 한시와 관련 배경 및 이해를 돕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각 장의 분량도 대여섯 쪽으로 하여 어린 독자들이 관심과 집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피하고 있다. 소개된 한시 원문 소개는 책 뒤에 일괄 수록하여 관심 있는 사람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고, 책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소개도 마찬가지로 책 뒤에 수록하여 참고하도록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매우 친절하게 한시의 세계에 입문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셈이어서 굳이 청소년 독자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도 무난하게 읽기 좋게 되어 있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P.24)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P.58)

 

한시(漢詩)도 언어와 문자의 형태만 달리 했지 시()라는 문학 형식임은 동일하다. 우리가 시에서 기대하고 느끼는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시대와 문화에 따른 일부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과 속성은 마찬가지다. 살며 사랑하며 죽는 과정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교감과 소통을 하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를 주저리주저리 문장으로 엮으면 산문이 되며, 말과 글을 아끼고 다듬어 운율을 집어넣으면 시가 된다. 따라서 저자가 이야기마다 화두로 삼는 한시의 속성 내지 본질은 결국 시의 그것을 가리킨다.

 

비록 덤덤하지만 그 속에 시인의 투명한 정신이 담겨 있을 때 진짜 시가 된다. 겉 꾸밈만으로는 안 된다. 참된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P.38)

 

시를 통해 우리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던 사물과 새롭게 만난다. 새롭게 만나려면 새롭게 보아야 한다. 남들 보는 대로 보아서는 그 사물의 새로운 점이 보이지 않는다. (P.77)

 

한시는 우리말로 된 시와 다른 독자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수천 년간 내려온 한문학의 전통과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탓에 특유의 정신과 관습이 우러난 것이다. 사군자를 노래한 시는 사군자 자체의 외적 아름다움만을 찬미하지 않는다. 선비들은 사군자 속에 깃들인 정신을 사랑하였다. 여기서 소개한 설중매의 고고한 아취가 그러하다.

 

저자는 정운의(情韻義)’라는 개념도 소개한다. “하나의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반복적으로 노래되다 보니 새로운 뜻을 갖게 된 것”(P.83)이라고 한다. 헤어질 때 주고받는 버들가지, 쓸쓸한 가을 부채의 의미는 자체로서 사전에 나오지 않는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니 무심히 넘길 게 아니다.

 

한시에서 한자라는 외형을 벗겨내고 보면 옛사람들의 민낯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들도 우리네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며, 자식의 죽음에 땅을 치며, 실의에 빠져 낙담하다가도 절의를 새삼 다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임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며, 매운 시집살이의 아픔을 시어에 절절히 녹이기도 한다. 정약용의 일화가 눈길을 끄는 것은 아내의 오래되어서 해진 치마가 단지 훌륭한 예술품으로 변모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가족과 자식을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다산의 찬찬한 글귀 속에 들어있는 절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정한 사람이리라.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다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난다. 마음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P.99)

 

편의상 한시라고 통칭하지만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이 남긴 글이므로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지은이의 성, 신분, 상황에 따라 다양함의 넓이와 깊이는 엄청나다. 같은 제재를 다루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지어진 시가 존재하며, 동일한 제재와 정서를 묘사하지만 지은이의 개성에 따라 묘미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기도 한다. 자연 속의 은거를 노래하지만 누구는 고독과 쓸쓸함을, 반면 은일의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시라고 어렵게 여길 필요는 없다. 한자가 신경에 거슬린다면 우리말 번역본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된 시문학을 번역시로 음미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물론 원문 자체를 독자가 직접 해독하고 감상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모든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은 없다. 우리말로 옮긴 시 작품에 공감할 수 있고 호기심이 커진다면 그때 가서 해당 언어를 익혀 직접 원문에 도전할 수 있다.

 

한시 속에 담겨 있는 우리 옛 선인들의 생각과 마음은 지금 우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단다. 다른 점은 옛날에는 한자로 썼는데 지금은 우리말로 쓴다는 것뿐이지. (P.178)

 

청소년 독자층을 대상으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마찬가지다. 한시의 내용이 특별난 게 아니며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은 동일하다는 것. 한시가 한갓 진부한 옛 유산에 불과하지 않고 현대에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라는 것. 한시 자체를 어렵게 여기지 말고 친숙하게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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