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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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읽은 후 정말 오랜만에 다시 펼친다. 그때 읽은 책은 범우사르비아문고인데, 책 표지가 오른쪽에 있고, 세로쓰기로 편집되어 있다. 옛 생각을 살려 서가를 뒤져보니 누렇게 변색한 책장에 세월의 간극을 느낄 수 있다. 놓아주어야 할 때가 너무 지난 모양이다.


당시 사춘기의 내게 충격이었던 점은 학업에 지친 주인공이 극단적 선택을 감행한다는 점이다. 작품에서는 한스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지만 삶에 지치고 목적을 상실한 그가 죽음을 간구하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영원히 쉬고, 잠들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낙담했고 비참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따끔거렸다. 기운이 없어서 도저히 일어나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어렴풋한 상념과 기억들, 수치심과 자책감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한스는 크게 신음하고 풀밭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P.212)

 

예나 지금이나 학업 스트레스는 줄지 않았다. 제아무리 학력 차별을 외치더라도 정작 수험생 처지에서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학업 이외 다른 진로를 선제적으로 모색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한스가 사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아이는 신학교와 대학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아야 소위 출세하게 된다. 학력의 혜택이 클수록 학력을 향한 경쟁은 치열하게 마련이며, 대다수 학생은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질문조차 없이 공부 자체에 막무가내로 매진하게 마련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곧 낙오자, 패배자가 되는 것이므로.

 

신학교에서도 동급생들을 앞지르려면 더 야심차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동급생들을 앞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래야 할까? 그 이유는 한스 자신도 알지 못했다. (P.53)

 

좋아하던 낚시도 금지되고, 산책도 통제받으며, 토끼 기르기도 막힌 한스는 학교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한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한스의 눈에 성적도 우수하지 못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굳이 어울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사회적으로도 당연한 것으로 용인받는다. 신학교에서 나온 한스가 자신의 동네에서 친구를 찾을 수 없기에 낯섦과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스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신학교 시절의 유일한 친구인 하일너는 퇴학당한 후 연락이 끊어졌고 신학교와는 더는 볼일이 없다. 고향 도시에서도 학교 교장, 목사, 아버지 모두 그와 공감대가 없다. 소년 시절 내내 공부만 하던 허약한 한스가 기계공이 된다는 게 지난한 선택이라는 점을 소설은 보여 준다.

 

진퇴양난이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에마와 만남이다. 갑자기 눈부시게 아름답게 변모한 세계를 인식하는 한스를 바라보며, 풋내기 한스가 노련한 에마 앞에서 쩔쩔매는 순진한 모습을 보며 독자는 안타까움과 순수함의 양가의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된다. 에마와 잘 풀렸다면 이른바 사랑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에마는 떠나고 한스는 마지막 기대도 허물어진다.

 

작가는 전반부에서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한스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아름답고 세심한 자연묘사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후반부의 자연과 유리된 한스와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인생의 가장 활기찬 시기를 보내는 한스가 뼈마디가 앙상할 정도로 여위고 두통에 시달리며 창백한 낯빛을 지닌 채 허우적거리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기조차 하다. 그의 모습은 광인 또는 좀비를 연상시킨다.

 

한스는 자신이 원해서, 공부가 너무나 좋아서 그런 길을 택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그저 부모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진실한 자신을 억누르려고 애쓴 딱한 아이일 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평범한 소년이었기에 스스로 파멸의 길을 따른 것이다. 지적 탐구심을 올바르게 삶의 여유와 조화할 수 있었다면 한스도, 다른 이들도 결과적으로 나았을 텐데. 아니 그가 만약 하일너 같이 개성 강하거나 고집이 셌다면 이렇게 비극으로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하일너의 마지막 소식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하일너는 떠났고, 소식이 끊어졌다. 하일너라는 인물과 그의 도주는 점차 이야기가 되었고 마침내 전설이 되었다. 훗날 이 열정적인 소년은 갖가지 어리석은 기행을 더 저지르고 더 방황한 끝에 삶의 고뇌를 엄격하게 다스려 위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어엿한 한 남자가 되었다. (P.137)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작가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다. 작가 자신 소년 시절의 체험을 짙게 반영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하일너처럼 용케 질곡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조금만 더 소심하고 나약했더라면 한스의 길을 따르지 않았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아무도 소년의 여윈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미소 뒤에 물에 빠져 가라앉는 영혼이 아파하고 있으며,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차 죽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도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과 학교가 이 연약한 존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멀리하게 만들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을 추구하겠다는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그에게 심어주었을까? 왜 시험이 끝나고 힘들게 얻은 방학 때조차 푹 쉬게 하지 않았을까?

무지막지하게 몰아댄 망아지는 길에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P.141)

 

스러져 가는 한스를 향한 작가의 안타까운 심경과 사회를 향한 분노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절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또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었음에도 한스에 대한 아픔이 내게 여전함은 내 아이의 처지가 과거의 나, 소설 속 한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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