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는 봄 : 청소년 비극 지만지 희곡선집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프랑크 베데킨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희곡 부문에서 소위 문제적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억압된 성()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이 작품 <눈뜨는 봄>(또는 <사춘기>)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에 대한 관심과 무지, 반면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와 교육관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사춘기는 2의 탄생또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릴 정도로 청소년들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신체는 급격한 성장을 거듭하는 반면, 정신적 성장은 아직 불완전하며, 가정과 사회적으로 그들은 미숙아로서 보살핌과 교육을 받는 대상이다. 그들은 인생과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찬 꿈을 품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장의 신체적 변화와 자연적 욕구의 성장에 당혹감을 품는다.


오늘날은 청소년들의 성교육에 대하여 대체로 긍정적이며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성문화의 확산이니 성 개방 풍조니 하는 일각에서 우려하는 현상도 앞서가는 서구에서도 1960년 이후에나 발생한 추세다. 따라서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세기 말은 전적으로 전근대적 보수적 사고관이 지배하던 시기임을 무엇보다도 인식해야 한다.


당시 성은 무조건 감추어야 하는 것, 어른들만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장 궁금한 질문, 즉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답변은 적당히 에두르는데 일차적 목적을 둔다. 우리의 경우,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식으로. 과거 유럽도 다르지 않다. 황새가 굴뚝을 통해 들어와서 아이를 주고 간다는 식으로. 그래서 벤들라의 호기심에 엄마 베르크만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결국은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부인 자신도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결혼 후에야 깨우친 내용이므로.


열네 살짜리 딸한테 그걸 말하느니, 차라리 태양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내 어머니가 내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했을 뿐이란다.” (P.138)


6장에서 벤들라가 멜히오어와 우연한 경험을 갖게 된 후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미소 짓는 걸 어머니가 보시니까. 넌 왜 입을 다물지 못하니? 난 몰라. 난 정말 몰라.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길이 마치 양탄자 같아....” (P.89)


이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당사자들의 성적 무지와, 어른들의 허위와 가식적 도덕관이 잘못 결합한 결과다.


모리츠의 자살 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교사 회의의 면면을 보자. 베데킨트는 신조어로 사춘기 청소년 문제를 논의하는 어른들, 즉 교사들을 비꼬고 있다. 원숭이 비계, 몽둥이, 주린 띠, 골절상, 혀 놀림, 파리 시체, 일사병 등의 이름을 가진 교사들이 제대로 사안을 다룰 수 있겠는가? 그들이 답답한 실내 환기를 위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설전을 보라.


벤들라는 잘못된 임신중절로 죽게 되고, 모리츠는 자살을 한다. 멜히오어는 청소년 감화원에 갇힌다. 에른스트와 핸셴은 동성애 관계를 맺는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성인 중 유일하게 긍정적이고, 앞서가는 인격을 갖춘 이는 멜히오어의 어머니 가보어 부인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모든 면에서 솔직하며 사실에 기반을 둔 가정교육을 한다. 그녀는 학교의 처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 말대로 그들은 희생양이 필요했을 따름이다. 아들이 남녀의 성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감화원에 들어갈 중죄에 해당되는가?


다만 당대는 가보어 씨의 다음 의견이 지배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소수자의 발언으로 치부되며, 그녀의 교육관과 그 결과는 다수와 충돌한 것이다.


멜히오어가 쓴 것 같은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면 깊숙이 썩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골수가 상한 거예요...그 글은 소름 끼치도록 분명하게 솔직한 의도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 자연적 성향, 부도덕한 경향 말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부도덕한 것이기 때문이오...” (P.123)


멜히오어가 묘지에서 죽음을 택하려는 순간 나타난 복면의 신사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어 지평을 환상적인 방법으로 확대시킬 수 있도록”(P.151) 해준다고 약속한다. 즉 그에게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흥미로운 것을 빠짐없이 알게”(P.151) 해주겠다고. 작가는 멜히오어를 죽음에 몰아넣어 완전한 비극으로 구성할 수 있었는데도 복면의 신사를 등장시켜 그를 구제한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유사한 인상을 준다. 둘 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의 김나지움을 무대로 한다. 베데킨트가 좀 더 성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양자는 기본적으로 가정과 학교의 인습적인 교육의 폐해를 노정한다. 엄격하고 보수적 가치관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욕망을 죄악시한다. 도덕의 이름으로 그것을 억누르는 데 급급하다.


여기서 양육과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인가 되새겨본다. 자녀를 본성과 자질의 자연스럽고 올바른 발로로 유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순응적이고 보다 성공하기에 유리한 인간형으로 만드는 것인가? 문득 이런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아니면 학부모입니까?


* 2011년에 쓴 글인데, 누락되어 있는 걸 찾아서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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