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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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를 읽다 보면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가슴 한쪽이 시리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파멸은 오로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그들 주변에 이야고 같은 악인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 혹자는 말한다. 굳건하고 진정한 사랑은 어떤 유혹도 이겨낼 수 있다고. 그만큼 오셀로의 사랑이 견고하지 못하였다는 뜻일까. 오죽하면 삼인성호(三人成虎)와 증삼살인(曾參殺人)라는 한자 성어가 있을지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옮긴이는 오셀로의 비극이 사랑과 질투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발생했다고 작품해설에서 밝힌다. 어디 오셀로뿐이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과 질투에 극단적으로 반응한다. 애증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애정이 깊을수록 증오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다. 이 작품에서 데스데모나가 그러하듯이. 불행하게도 오셀로는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야고) 무어인은 내가 그를 아무리 못 참아도 / 변함없고 고귀하며 애정어린 본성을 가졌고 / 내 감히 생각건대 데스데모나에게는 / 정말로 소중한 남편이 될 것이다. (2막 제1, P.75)

 

오셀로라는 인물 자체의 내적 탁월함은 이야고조차 인정할 정도다. 몬타노는 그를 훌륭한 총독, 완벽한 군인으로 상찬한다. 4막 제1장에서 로도비코의 탄식은 오셀로에 대한 베니스 정부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비극은 외견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합에 내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셀로가 무어인이 아니라면 이런 결과로 이어졌을까에 대해 의문스럽다. 작중에 무수히 반복되는 오셀로에 대한 무어인이라는 호칭. 직접적인 비난이 아니더라도 호칭 자체가 이미 비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물며 이야고와 브라반시오는 각각 그를 검은 숫양, 시커먼 악마로, 숯검정으로 대놓고 경멸적으로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다.

 

(오셀로) 아마도 내가 검고 안방 출입 한량들의 / 능숙한 사교술이 없기 때문이거나 / 내 나이가 황혼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 하지만 깊이 들어간 건 아닌데- / 그녀는 떠나갔어. 난 속았고 내 위안은 / 그녀를 증오하는 것이야. 오 결혼의 저주여, (3막 제3, P.114)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사랑은 공인받고 떳떳한 부부 관계로 이어지지만, 오셀로조차 인정한 자신의 약점이라는 내재적 불안이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라 단지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을 뿐이며, 이야고에 의해 의식 세계로 끌어올려 진다. 이제 그는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 앞에서 왜소하고 초라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 불안이 고귀한 오셀로를 서서히 좀먹고 그는 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단연 문제적 인간은 이야고다. 그는 전형적 악인으로 소임을 다하는데 그 악행은 특별한 계기가 없다는 점이 이채롭다. 모두에게는 정직한 이야고로 불리지만 사실 이야고는 타고난 악인이다. 그는 서두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이야고) 그들은 복종하는 태도와 안색을 보이지만 / 속마음은 자기네 자신들만 보살피며 / 높으신 분들에게 봉사하는 척하지만 / 그들을 이용하여 착실히 번성하고 / 자기네 실속을 두둑하게 차렸을 땐 / 자기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한단 말입니다. / 그런 친구들은 기백이 살아 있고 / 전 제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공언합니다... (1막 제1, P.26)

 

극 중에서 이야고는 자신이 오셀로를 파멸시키려는 이유를 자신의 부관 승진 실패와 오셀로가 자신의 부인과 부정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의심에 대한 복수로 설명한다.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음은 독자가 누구보다 잘 안다. 특히 후자는 완벽한 망상이다.

 

이야고는 낮은 신분상 부관 승진을 꿈꾸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다. 후에 부관 카시오가 오셀로의 후임으로 키프로스 총독에 임명되는 점을 상기하자. 한편 이야고의 아내 에밀리아의 정조는 제4막 제3장의 데스데모나와 대화에서 명백하다. 여기서 그녀의 페미니즘에 입각한 남성 비판은 또 다른 흥밋거리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에밀리아의 충심도 주목해야 한다. 최후의 순간 그녀는 불의한 남편을 거스르고 절규와 폭로로 가려질 뻔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는다.

 

(오셀로) 제발, 저 악마 인간에게 물어봐 주시겠소, / 왜 그렇게 내 영육을 덫에 몰아넣었는지?

(이야고) 나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시오, / 당신이 아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 난 지금부터 한마디도 안할 거요. (5막 제2, P.195)

 

이야고는 자신의 행위의 진정한 의도에 침묵한다. 이로써 관객은 영원히 진상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이야고의 악행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이야고는 태생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으며 계속적 악행이야말로 그의 존재 이유라고 한다. 정말 이대로라면 그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하겠는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 데스데모나를 기억해야 한다. 자칫 그녀의 비극적 운명에 함몰되어 그녀가 가녀린 여성이 아님을 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놀랍고도 이질적인 결합”(P.223)을 이루어 냈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오셀로에 대한 사랑을 한순간도 저버린 적이 없다. 비록 그의 손에 죽어 가면서조차도. 지고지순한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 난 죄 없이 죽는단다.

(에밀리아) , 누가 이런 짓을 했나요?

(데스데모나) 누구도 아니고 내가 했어. 안녕. / 친절한 주인님께 안부나 전해줘. , 안녕! (5막 제2, P.187)

 

다시 오셀로로 돌아가자. “설명과 극찬을 능가하는 아가씨”(2막 제1, P.64)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얻고 결실을 이룬 오셀로의 행복감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죽여야 하는 오셀로의 슬픔은 제5막 제2장의 절규에서 절정에 이른다.

 

(오셀로) 죽어서도 이렇다면 난 너를 죽여놓고 / 그 후에 사랑하리. 한번 더. 이제 마지막으로. / 이렇게 치명적인 향내는 절대로 없었어. / 난 울어야 하지만 내 눈물은 잔인하다. / 이 슬픔은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내려치는 / 천벌과 같구나. (5막 제2, P.181)

 

극도의 절망과 분노로 아내를 죽인 오셀로가 자신이 간계에 빠졌고 그녀는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오셀로의 슬픔과 회한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다. 동일한 수준의 극한 감정을 경험한 자가 아니고서는.

 

(오셀로) ......당신은 / 무분별하게, 너무 많이 사랑한 사람을, / 쉽게 질투하진 않지만 일단 빠지면 /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버린 / 비천한 인디언과 같은 사람을, / 부드러운 분위기에 익숙하진 않지만 / 차분히 가라앉은 두 눈에서 눈물을 / 미르라나무가 약용 진액을 흘리듯이 / 줄줄 쏟아내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5막 제2, P.197-198)

 

결국 오셀로의 잘못은 너무 많이 사랑한 데 있었나 보다.

 

앞서 읽은 <햄릿>과 마찬가지로 옮긴이는 대사 전체를 운문으로 번역하였다. 원작의 무운시로서의 본질을 상기시키고 작품의 운문적 성격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그동안 산문으로서의 셰익스피어에 익숙한 독자로서는 처음에 낯설게 다가오지만 점차 묘한 매력과 재미에 빠져듦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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