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서재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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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의 다자이는 작가의 전모가 아닌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다채로운 작품 면모는 초기작 <만년>에서도 드러나지만, 단편의 속성상 체감 정도는 여기 수록작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의 개성적인 특색은 아마도 희극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일부러 조소하고 비하하는 자학 개그, 그의 본원이 무엇인지 간에 어쨌든 독자는 그의 해학미에서 미소를 짓게 된다. 그의 잇따른 어두운 작품 세계에서 독자가 절망하고 지치지 않는 원동력도 여기에 있으리라고 믿는다.

 

<쓰가루>에서 화자는 쓰가루의 험담을 자주 내뱉곤 한다. 유명 작가만 화제에 올리며 정작 자신은 언급하지 않는 주위 사람들에게 푸념도 늘어놓는다. 그의 투덜거림이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는 까닭은 작가가 대상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음에서이다.

 

나는 쓰가루 사람이다. 선조 대대로 쓰가루 번의 백성이었다. 말하자면 쓰가루 토박이이다. 그래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이와 같이 쓰가루의 험담을 하는 것이다. (P.30)

 

이러한 애정은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공통점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전시체제가 극에 달한 때에 작가는 고향과 과거로 시선을 돌린다. 전시상황에서 작가는 모종의 선택을 해야 한다. 어용이 되거나 절필하든지 아니면 작금과 동떨어진 글을 쓰든가. 다자이는 마지막을 골랐다. 물론 <석별>에 대한 판단은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옛날 이야기>는 유명한 전래동화를 작가가 리메이크한 것이다. ‘혹부리영감’, ‘우라시마’, ‘부싯돌 산’, ‘혀 잘린 참새’. 작가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상투성을 뒤집어 놓는다. 쓴맛을 보는 다른 혹부리영감은 탐욕이 원인이 아니라 진지함의 외피로 놀이의 즐거움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라고. 용궁에 다녀온 모모타로가 한 줌의 연기로 사라짐은 슬픈 사건이 아니라 그로서는 다행이라는. 마찬가지로 악역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너구리가 사실은 토끼를 사랑한 죗값이라는 등.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을까. 다수의 힘을 등에 업은 여론의 오도와 편향에 함몰되지 말고 자신만의 독자적 판단과 견해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루쉰이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자이는 루쉰과 동문수학했던 늙은 의사의 수기 형식(이 형식은 다자이가 애용하던 기법이다.)으로 일본 유학 시절 루쉰의 모습을 창조적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그가 문학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석별>에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중국의 적나라한 봉건적 현실에 절망한 루쉰의 심경은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냈다고 할지라도 매우 설득력이 높고 그만큼 절절하다. 저우 씨와 화자, 그리고 후지노 선생이 갖는 공통의 약점-주변인이 중심인에 대해 갖는 열등감은 다자이 작품 세계의 중요한 요소다-과 소위 국경을 초월한 묘한 우정.

 

순수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논란거리도 분명 존재한다. 우선 집필 계기가 군부와 우익단체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 물론 작가는 집필의 순수성을 말미에 밝히지만 어쨌든 찜찜한 면은 사실이다. 왜 하필 그 시점에서 중국의 후진성과 일본의 선진성을 대비하고, 루쉰을 통해 중일 우호를 표방하는지. 게다가 작중에서 러일전쟁을 언급하며 일본이 중국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라고 하는 인식(P.237),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단언(P.272) 등은 집필 시기와 결부할 때 작가의 순진한 역사 인식과 더불어 미필적 고의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쓰가루>는 개인적으로 다자이의 작품 중 가장 읽어서 기분이 좋고 호감이 가는 글이다. 분류상 소설에 가깝지만 역시 허구와 현실의 교묘한 결합이며 현실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 기행문의 성격도 다분하다. 개인적으로도 쓰가루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구글 지도로 작품 내 등장하는 주요 마을과 지형도 찾아봤을 정도다. 이와키산과 주산호도 구경하고 싶지만, 무엇보다 땅끝마을인 닷피의 비인간적인 풍경도 체험하고 싶다.

 

주위 풍경이 왠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무시무시해졌다. 처참하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이미 풍경이 아니었다. 풍경이라는 것은 긴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형성되는, 말하자면 인간의 눈에 닳아서 부드러워지고 인간에게 길들여지고 친숙해져서,...인간의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P.104)

 

얼핏 보면 작가의 고향 방문기 또는 기행문 정도에 그칠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후반부에 있다. 화자가 고향 친척과 만나는 장면이다. 형제간임에도 어색하고 서먹서먹함이 독자에게조차 진하게 배어 나옴에서 일찍이 가족들에게 절연 당한 다자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고향, 특히 가족은 정신적 평온함이 아니라 오히려 피곤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임이 애틋하다. 그런 면에서 다케를 찾아 나서는 모험은 특별하다. 어린 자신을 돌봐주었던 보모에게서 그는 진한 모성애를 느낀다.

 

이번에 내가 쓰가루에 와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만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일생은 그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P.166)

 

형제 중에서, 나 홀로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고 차분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은 이 슬픈 키워준 부모의 영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때 비로소 내 성장 과정의 본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결단코 고상하게 자란 남자는 아니다. (P.185)

 

고향은 자기 존재의 근원이다. 화자가 쓰가루 방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단순한 풍토기가 아님은 명확하다. 고향의 T, N, S씨를 통해 가련할 정도로 우직한, 그러나 시속에 흔들리지 않는 본연의 우의를 발견할 수 있다. 고향 가족과의 만남도 비록 껄끄러움은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사안이며, 의외로 마음 따뜻한 대목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화자가 자기의 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하는 건 다케와의 해후를 통해서다. 갑작스러운 종결은 작가가 쓰가루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음을 뜻한다. 더 이상의 서술은 사족에 불과하므로.

 

다자이 오사무 하면, 그의 만년 <사양><인간실격>의 가라앉고 음울한 작품 세계가 연상된다는 독자에게 이 책을 읽히면 같은 작가가 굉장히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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