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지은 어머니 지만지 희곡선집
보마르셰 지음, 이선화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옮긴이에 따르면 국내 초역이라고 한다. 로시니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애호가라면 그리고 양자의 원작을 읽었던 독자라면 전혀 상반되는 작품 분위기에 당황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이 작품은 보마르셰가 전작의 틀을 뒤집기 위해 작심하고 썼음을 보게 된다. 이 작품은 희곡이 아니라 드라마로 분류되는데 드라마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작품해설에 잘 나와 있다.

 

드라마가 진지함과 웃음을 뒤섞으며 부르주아의 덕목을 강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 극은 전적으로 드라마의 이상에 잘 부합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P.198)

 

백작 집안의 숨겨진 가족관계를 축으로 하여 양단에 베제아르스(베가르스)와 피가로가 자리 잡고 있다. 베제아르스는 가족관계의 비밀을 한 손에 쥐고 집안 식구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피가로는 이러한 베제아르스의 속셈을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백작 가족 내의 대립과 갈등 관계가 베제아르스와 피가로의 대결 구도로 연계되고 증폭하는 구조로 극이 전개된다.

 

극중 인물 베제아르스(베가르스)는 보마르셰가 관여했던 코른만 사건의 상대편 변호사 이름 베르가스를 차용하였다. 코른만 사건의 제재 자체가 이 작품과 매우 유사함을 볼 때 창작 동기에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게 한다.

 

극 중의 핵심 사안인 레옹을 낳게 한 백작 부인과 셰뤼뱅의 불륜을 보는 관점에 따라 백작과 백작부인의 고뇌와 갈등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레옹에 대한 백작의 냉정한 처사와 플로레스틴을 베제아르스와 결혼시키려는 백작의 의도도 이와 연관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국내 두 번역본에는 다소간 차이가 있다. 2막 제3장에서 백작은 부인의 비밀 편지를 읽는다.

 

(백작) 야밤에 당신의 기습 방문. 이어진 완력. 마지막으로 당신이 저지른 죄 - 내 죄는... [이선화 번역본]

(백작) 감히 밤늦게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고, 우리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는 죄를 짓고 말았어요. [이경의 번역본]

 

전자에 따르면 백작부인은 완력에 의한 희생자일 뿐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레옹을 낳게 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불륜을 저질렀음이 명확하다. 한편 백작부인은 셰뤼뱅과 주고받은 편지를 고이 보관하고 있다가 백작에게 들키고 만다. 백작부인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타르튀프는 피가로가 베제아르스를 비난하는 어조로 일컫는 별칭이다. 극 중에서 베제아르스는 백작 부부와 레옹, 플로레스틴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외견상 그의 겸손과 절제, 정직과 현명한 지혜는 흠잡을 데가 없다. 피가로의 비난이 오히려 부당하게 인식될 정도다. 그런데 베제아르스가 스스로를 타르튀프로 인정한다면, 극의 성격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2막 제24장이 그러하다.

 

(베제아르스) ! 특급 스파이! 훌륭한 하인으로 위장한 깡패 중의 깡패야! 돌출 행동으로 이목을 끌면서 지참금을 가로채려는 심산이지! 이 오노레 타르튀프의 배려로 당신은 몰타의 대상들과 실랑이하느라 우리를 감시하는 짓은 끝내게 될 거요. [이선화 번역본]

 

(베가르스) 고단수 밀정이자 희대의 익살꾼인 네놈이 감히 나를 연극에 나오는 이름으로 부르며, 지참금을 가로채려고 충직한 하인 행세를 하다니. 이제 그대는 내 덕분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은 그만두고, 해상 원정대의 불편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야. [이경의 번역본]

 

베제아르스는 철두철미한 인물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속내를 감추며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20년을 계획하고 획책하였다. 피가로가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여 진작 백작 나으리가 되었을 것이다. 완벽한 베제아르스의 치명적 실수는 쉽사리 쉬잔을 동지로 간주하여 속내를 털어놓았다는 점이다. 이 점이 작품 중 가장 허술한 대목이다. 어쨌든 쉬잔 덕분에 피가로는 베제아르스의 술수를 짐작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피가로) 그런데 그자의 실수를 유도하고 입을 틀어막는다고 뭐 뾰족한 수가 있을까? 그자는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하긴 어리석음과 허세는 같이 가는 거니까! [이선화 번역본]

 

(피가로) 하지만 그 인간이 무슨 급박한 이유가 있어 그렇게 비밀을 누설하는 실수를 저질렀을까?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하지? 허영심이 지나치면 꼭 어리석을 짓을 한다니까. [이경의 번역본]

 

피가로의 제2막 제7장 대사를 들어보자. 보다 정확한 번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극의 전개로 볼 때 후자가 보다 자연스럽고 맥락이 연결된다. 그리고 그의 야욕은 제4막 제3장에서 명확히 자신의 입으로 드러난다.

 

(베제아르스) 베제아르스! 행복한 베제아르스...! 왜 당신은 그를 베제아르스라고 부르지? 이제 그는 절반은 알마비바 백작 나리가 아니던가? (소름끼치는 어조로) 이제 한 발짝만 가면 돼, 배제아르스! 곧 너는 이제 완벽하게 그가 되는 거야.

 

마지막으로 불행한 레옹을 살펴본다. 그는 백작으로부터 냉대받는 가련하고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로 극 중에 등장하므로 언뜻 허약하고 평범한 인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그가 매우 명석하며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로서 새로운 세대의 전형임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독서회에서 자신이 쓴 에세이를 낭독한다거나, 백작과의 대화에서 계몽인의 자질을 드러낸다.

 

어쨌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전히 피가로다. 이제 그는 과거의 혈기 왕성하고 자유분방한 꾀돌이는 아니다. 그만큼 나이도 들었지만 시대의 변화와 작품의 성격에 부합한 변모이다.

 

혁명을 통해 하인 계급에서 서민 계급으로 부상한 피가로는 이제 얄팍한 잇속이나 챙기는 계산적인 인간에서 신의와 충정을 중요시하는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인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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