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을 든 사람들 시공 청소년 문학 24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세우는 등 사백여 년에 걸쳐 브리튼을 강력하게 지배하였던 로마 제국이 철수한다. 이제 브리튼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다툼이 원주민 켈트족과 스코트족, 잔존한 로마인들 간에 전개되는데, 북해 건너 앵글로색슨으로 대변되는 게르만족도 풍요한 지역을 찾아 브리튼에 거점을 구축한다.

 

주인공 아퀼라는 철수하는 로마 군대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로마인이지만 브리튼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가족이 있는 자신의 땅이다. 잔류의 대가는 혹독하여 온 가족을 잃고 그는 색슨족의 노예가 된다.

 

이 작품은 5세기 브리튼의 역사를 배경으로 보티건 왕과 색슨족 헹기스트의 동맹과 배신, 로만 브리튼의 암브로시우스 간 전쟁을 다루고 있다. 헹기스트의 딸이 보티건 왕과 결혼하자 전처의 아들들은 자신의 일파를 거느리고 암브로시우스에게 합류한다. 아퀼라도 우여곡절 끝에 암브로시우스의 수하로 들어가 동반자들의 일원으로 색슨족을 물리치기 위한 기나긴 투쟁에 동참한다. 역사적으로도 작품 내에서도 로마인들의 고토 회복은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실제 역사는 색슨족의 브리튼 통일로 귀결된다. 암브로시우스는 켈트족을 견제하며 색슨족을 물리치고 로마를 다시 일으키려는 로마 세력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훗날 아서왕 전설의 근원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로만 브리튼 아퀼라에게 색슨족은 자신들을 침략한 용서할 수 없고 영토 밖으로 내쫓아야 할 외적에 불과하다. 원주민 켈트족의 시각에서 보자면 로마 제국은 아퀼라에게 있어 색슨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색슨족의 입장에서 그들이 본거지를 떠나온 이유는 자명하다.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그들의 이주는 절실한 부족 생존의 차원이다. 브리튼에 정착하지 못하면 그들의 앞에는 오직 멸족만이 남을 뿐이다. 적대시하던 켈트족과 스코트족이 손잡고 색슨족과 연합하여 암브로시우스와 운명을 가를 일대 회전을 벌인 것은 아퀼라 일행에게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그들로서는 자신의 최대 적은 로마인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과 함께 색슨족을 탈출하길 거부한 누이 플라비아에게 느낀 생소함과 씁쓸함은 아들 송사리와 함께 잔류하는 네스를 보며 비로소 사그라진다. 그네들로서는 어쨌든 부족을 배반하더라도 자신의 남편과 아이가 있는 곳을 떠날 수 없었다. 무자비하고 냉혹하지만 역사 속 개인의 삶은 이렇게 굴러간다. 그러기에 적으로 마주친 누이의 아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돌려보낸 아퀼라의 선택 또한 불가피하였다.

 

커다란 희생을 무릅쓰고 암브로시우스가 승리를 거두고 켈트족과 색슨족의 수장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코 전쟁의 끝을 뜻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은 야만족에 의해 스러지고 있고, 모국의 원조가 없는 로만 브리튼은 서서히 지는 해에 불과하다. 루투피아에의 불은 어둠에 저항하는 불인 동시에 세상 모든 것과의 작별 인사이다. 횃불이 꺼지기 전까지 아퀼라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짙은 어둠을 헤치고 걸어갈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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