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 61-1
크누트 함순 지음, 김남석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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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유명한 <절규>라는 그림 속 주인공. 함순의 이 작품 속 화자의 이미지가 묘하게 뭉크와 중첩된다. 눈이 퀭하고 머리칼도 빠져 듬성듬성해지며 뺨도 홀쭉하여 한마디로 앙상한 몰골. 차라리 다큐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아프리카 기아민들의 영상이 더 적나라할 것이다. 지독한 굶주림에도 여기 주인공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내 얼굴이 어찌되었단 말이냐? 정말 나는 죽을 상이란 말인가? 나는 손으로 뺨을 만져 보았다. 말랐다. 마른 것이 당연하였다. 나의 볼은 두 개의 접시를 바닥을 안으로 하게 세워 놓은 것 같았다......나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랐을 것이다. 그리고 눈은 머리통 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내 얼굴 꼴이 어떨까? (P.113)

 

화자는 신문 기고료로 생계를 유지하는 문필가다. 낮은 고료와 불안정한 수입으로 점차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는 가운데 인텔리 특유의 오만과 자존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눈물겨움을 넘어 우습기조차 하다. 주인공이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아사에 이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우연과 요행의 덕택이다. 내용만 보면 암울하고 질척거리며 답답하기 그지없을 것만 같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현실과 배치되는 자의식이 빚어내는 엇박자가 빚어내는 어처구니없지만, 다분히 자학적이며 해학적 면모에 기인한다. 초반부의 거지 노인과 동행 장면, 공원 벤치에서 만난 노인과의 거짓말 대화, 잡화점 점원의 실수로 얻게 된 뜻밖의 횡재와 전전긍긍, 하숙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온갖 비굴함도 의연하게 감수하는 당당함 등

 

1인칭 시점으로 오롯이 진행되는 이 작품에는 별다른 극적인 사건도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나와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는 사회뿐. 작가의 관심은 오로지 화자 자신과 내면으로 향해 있다. 제아무리 부인-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길 한사코 거부한다. 그런 그의 외양은 외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미쳐가는 존재일 뿐이다-하고 분투해도 극한상황에서 서서히 침몰하는 개인의 자아. 이성과 허위의 외피를 벗어던지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연약하고 비이성적인, 때로는 비겁하기조차 한 인간의 분명한 실체.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소설은 소외된 인간 내면과 심리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문학적 형상화다.

 

윌라얄리와의 관계는 단색조 같은 작품에 잠시 이채로운 색채를 부여한다. 그녀가 그를 거부한 연유가 그의 미친듯한 모습에 있는지 또는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인정하기 거부하는 그에 대한 실망감인지 알 수 없다. 아니면 그녀가 실제로 그를 사랑했는지조차도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인 우리도 확신할 수 없다.

 

함순은 나치 독일의 지지와 찬양으로 노년에 명성을 잃고 몰락하고 말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임에도 한동안 금기시되고 잊혀진 작가가 되고 말았다. <굶주림> 외에 다른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근년의 일이다. 나치즘이야말로 인간 이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할 때, 비이성과 광기의 작품을 쓴 작가로서 함순의 성향은 다분히 추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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