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합본) 다림 청소년 문학
이미륵 지음, 윤문영 그림, 정규화 옮김 / 다림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 출신의 독일 작가가 모국과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작품이다. 일찍이 범우사에서 반복하여 소개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게 뭐지, 하며 가벼이 넘겼는데 문득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때마침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적당한 책도 찾고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펼쳐들었다.

 

구한말 황해도 해주 출신의 작가는 경성으로 유학 왔으나 삼일운동에 가담한 후 체포를 피해 유럽으로 도피한다. 독일에 정착한 작가는 현지인들에게 낯선 자신의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소개를 겸하여 자전적인 작품을 독일어로 집필한다. 이 소설은 당대 가장 빼어난 독일어 문학작품으로 평가받아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였다. 이 정도까지 대략적인 작품 소개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의 독일 사람에게 있어 작가는 낯선 나라의 일개 동양인에 불과했을 것이며, 한국, 혹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인식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식민지는 찰나에 불과하다고 강변해봤자 그들에게 먹혀들 리 없을 터이니 작가는 차라리 모국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경치와 소박하고 따뜻한 사람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지닌 나라와 사람들을 글로써 소개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이 예술인이 발걸음을 조금씩 옮기며 흥이 나서 조용한 밤을 향해 타령을 계속 불어 대는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말소리 또한 내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새 일본인 거리 남쪽에서는 수많은 불빛이 반짝거렸고, 북쪽의 옛 한국인 지역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삼각산 위에는 벨벳처럼 검은 밤하늘이 펼쳐졌고, 옛 창덕궁은 과거 속으로 잠겨 들었다. (P.164)

 

번역본만으로도 이토록 아름다운 글인데, 빼어난 독일어 원문으로 표현된 문장을 접한 이국인들의 감회는 어떨지 궁금함을 자아낼 정도다.

 

모국을 떠나온 지 약 이십 년이 지나버린 시점. 작가 자신의 입장에서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머나먼 조국에 대한 한 가닥 인연과 추억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으리라. 나이 들수록 선연해지는 향수와 어린 시절의 갖가지 추억은 그에게 가슴 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글로 형상화하여 주변에 공유하길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을 비록 현실에서는 재회하지 못하더라도 문장 속에서나마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으리라.

 

이 작품은 또한 성장소설에 해당한다. 일개 철부지였던 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구한말 시골의 정서, 건강 악화로 인한 요양 생활과 일제 지배가 시작된 후 변질되는 사회 세태, 부모와 속 깊게 교감하던 장면들, 그리고 유학생활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과 전환되는 인식. 일경의 단속을 피해 불안과 초조에 숨어 지내던 체험, 그리고 목숨과 일생을 건 출국 시도. 연대기 순에 따른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소년을 거쳐 타지에 홀로 남게 된 당당한 청년에 이르는 성장은 개인과 시대를 함께 아우른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아직 때 묻지 않은 옛날의 우리네 사람들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으면 충분할 것이다. 두드러지거나 대단한 게 아님에도 문득 회상하면 정겨움이 배어나오는 그 아련함. 우리 아이들이 과연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이미 백 년도 훌쩍 경과한 첨단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한편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참으로 딱하고 불쌍함마저 드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작가 이미륵의 독일에서의 삶도 평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혼란과 나치의 대두, 그리고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 그런 그가 꿋꿋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잊지 못할 모국과 고향, 가족에 대한 그리움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작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지병으로 세상을 뜬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하겠다. 비록 갓 오십을 넘은 이른 나이지만, 가뜩이나 별 볼일 없는 신생 국가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목도한다면 가슴은 찢어지고 말았을 테니.

 

표제는 작가가 중국으로 탈출하며 바라본 압록강의 풍경에서 가져왔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는 모국. 국경선을 따라 쉼 없이 흐르는 강줄기는 처연함마저 안겨준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둡고 진지했으나, 저쪽은 모든 것이 작고 맑게 보였다. 초가집들이 언덕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벌써 저녁 연기가 이 집 저 집의 굴뚝에서 솟아올랐다. 저 멀리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 산들이 잇달아 늘어서 있었다. 산은 햇빛에 빛나고 있었고, 황혼의 아름다운 빛에 물들었다가 서서히 푸른 노을 속으로 잠겨 갔다. (P.187~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